브랜드의 색을 뺀 브랜디드 콘텐츠
여기, 최근 화제가 되는 단편영화가 있다.
영화의 시작은 테이블에 멍하니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그의 앞으로 두 사람이 다가오고, 좋은 꿈 꿨냐며 친절하게 안부를 묻는다.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남자에 대한 인터뷰가 진행되는데, 이야기를 듣자 하니 이 남자에게는 꿈과 관련된 특별한 능력이 있어 보인다.
5분가량의 인터뷰가 지나고,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나오는데 가장 먼저 나타나는 자막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삼성전자’다.
지난 25일,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 한 영화의 특별상영회와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메모리즈>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꿈을 기억하는 능력을 가진 일러스트레이터 현오(김무열)가 꿈을 담은 메모리칩을 통해 잊히지 않는 꿈의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린 SF영화다.
주인공 현오 역의 김무열 이외에 안소희, 오정세, 박지영, 권정택, 김미수 등의 배우들이 캐스팅되었고, 영화의 연출은 김종관 감독이 맡았다. <더 테이블>, <최악의 하루>, <페르소나> 등을 연출한 이력이 있다.
이 영화는 ‘삼성전자’에서 제작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삼성전자에서 제작했지만, 삼성전자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기 때문에 이를 기억과 꿈을 연결하는 이야기 전개의 매개체로 활용하긴 했지만, 영화 속 등장하는 메모리 반도체조차 로고가 없는 미래형 디자인이다.
‘브랜디드 콘텐츠(Branded Contents)’가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 없도록 최대한 브랜드를 덜어내는 것이 특징이긴 하지만, 짧은 스낵 영상도 아니고 30분 동안 진지하게 펼쳐지는 단편 영화 속에 이 정도로 브랜드가 노출되지 않는 것은 꽤 인상적이다.
개봉한 채널이 ‘삼성전자 뉴스룸’의 유튜브가 아니었다면, 어두운 분위기와 세련된 연출이 돋보이는 SF 영화 한 편을 감상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브랜디드 콘텐츠의 ‘광고적 요소’ 대신 ‘작품성’을 택한 파격을 선보였다고 할 수 있다. CGV가 아니다, 삼성전자의 행보라 특별한 것이다.
이러한 파격이 큰 울림을 준 것일까? 사람들의 반응이 매우 뜨겁다. 지난 25일에 ‘삼성전자 뉴스룸’ 유튜브에 공개되고 하루 만에 340만 조회 수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고, 이 글을 작성하는 26일 밤 기준으로 415만을 기록했다.
영상 게시글에 달린 댓글 반응도 칭찬 일색이다. 영상의 분위기와 배우들의 호연, 영화의 메시지 등 다양한 칭찬이 보이지만, 무엇보다 ‘광고로 느껴지지 않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는 의견이 눈길을 끌었다. 이 정도로 브랜드의 색을 뺐지만, 브랜디드 콘텐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파격을 선택하면서도 의도대로 흘러가게 만드는 브랜드 파워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이쯤 되면 여러분도 영화가 궁금해졌을 것 같으니, 링크를 남기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본다.
[Movie] "메모리즈" (MEMORIES, 2019)
사실, 삼성전자의 오리지널 콘텐츠에 대한 고민은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2017년 말부터 삼성전자는 영화와 웹드라마 등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해 왔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를 연출한 멜로 영화의 거장 허진호 감독은 단편영화 <두 개의 빛: 릴루미노>를 연출했다. 영화 제목 속 ‘릴루미노’에서 알 수 있듯이 저시력 장애인을 위해 개발한 VR(가상현실) 기기 전용 애플리케이션 릴루미노를 소재로 한 삼성전자의 첫 단편영화다.
이후, 2018년에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 배종 감독과 배우 변요한, 공승연, 박희순 등과 함께 사회공헌 프로그램인 드림클래스를 소재로 영화 <별리섬>을 제작했다. 꿀알바를 찾아 별리섬으로 들어온 신입 영어 강사 한기탁(변요한)이 3년 차 베테랑 수학 강사 정석(공승연)과 함께 개성 강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당시 조회 수 6천 만을 넘길 정도로 큰 화제가 되었다.
<별리섬>도 <메모리즈>처럼 30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광고성은 최대한 배제하고, 작품 자체에 집중했다. 감상한 필자의 소감으로는 적절히 따뜻하고 정겨우면서도 훈훈한 좋은 단편영화로 느껴졌다. 하나의 영화로서 재미와 감동을 주었고, 하나의 광고로서 삼성전자의 사회공헌 활동을 자연스럽게 알리는 데 성공했다. 영화로도, 광고로도 매력 있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겠다.
삼성전자는 이 밖에도 웹드라마 ‘고래먼지’, 웹툰 ‘나노’, 자사 유튜브 채널 ‘삼성전자 뉴스룸’의 자체 콘텐츠 ‘헬로 칩스’ 등을 통해 적극적인 대외 커뮤니케이션을 이어가고 있다. 소비자가 익숙하면서도 흥미를 느끼는 미디어를 통해 자사의 기술, 제품, 사회공헌 활동 등을 효과적으로 알리고 있다.
*소개한 두 편의 단편영화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Movie] Two Lights: Relúmĭno - 두개의 빛: 릴루미노
그렇다면, <메모리즈>를 비롯한 삼성전자의 브랜디드 콘텐츠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지난 10년간 ‘기업미디어로서’ 삼성전자가 보여 온 행보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브랜드 저널리즘(Brand Journalism)’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기에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은 ‘기업미디어’라는 화두를 들고 나왔다. 황무지를 일구는 것과 같았던 이들의 도전은 어느덧 10년 차를 맞이했고, 기업미디어의 국산화 모델 구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언론에 보도자료가 나가는 동일한 시점에 소셜미디어에서 일반 개개인도 삼성의 주요 뉴스를 텍스트, 동영상, 이미지 등으로 전달받는 시스템인 ‘SMNR(Social Media News Release)’, 지금은 흔하지만, 공개 당시에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온라인 생중계(Live Stream)’ 등 다양한 도구를 통해 기업미디어로서의 관점과 철학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왔다. 그 결과,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국내의 대표적인 기업미디어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소개한 단편영화 <메모리즈>도 결을 함께 한다. 미디어 환경이 변하고, 포맷이 바뀌고, 새로운 니즈가 등장하고 있지만, 삼성전자가 ‘기업미디어’로서 지향하고자 하는 길이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브랜드의 '가치'를 소비자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습득하고,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아마 삼성전자가 오늘날 기업미디어의 대표적 사례가 된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삼성전자가 보여준 파격은 앞으로 기업미디어의 새로운 ‘변주’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시각각 변하는 뉴미디어의 세상 속에서 브랜드는 어떤 방법으로 소비자의 감성을 터치하고, 공감을 얻어내며, 가치를 전달할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