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우중충한 날씨를, 누구는 엄격한 입국 심사를, 누구는 값비싼 물가를, 또 누구는 맛없는 음식을 말했죠.
실상 틀린 말 하나 없었습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런던을 좋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그 우울한 여정은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됐습니다.
실제로 런던 입국 심사는 엄격하기로 소문이 자자해요.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어떻게 하면 무사통과할지, 어떤 질문이 나오는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등 예비 여행자의 걱정 어린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가득합니다.
'훗. 그런 건 여행 초보나 영어 울렁증이 있는 사람들이나 찾아보라지.'
저는 코웃음 쳤어요.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입국 심사에서 문제가 생긴 적 없었거든요. 그만큼 여행길에서 배짱이 두둑해졌습니다.
"언제 영국에서 출국하실 거죠?"
"2월 20일이요. 여기 출국 항공권이 있는 데 확인해보시겠어요?"
"영국에서 계획이 뭐죠?"
"런던에 있으면서 관광을 하려고요."
"유럽에는 언제 어디로 입국했죠?"
"작년 11월 독일에 처음 도착했는데요."
제 여권을 스캔하던 입국심사관이 사무적으로 물었어요. 저와 눈도 한번 마주치지 않고 차가운 질문만 계속 이어갔죠. 자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따위 없는 냉청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뭐 어쩌겠어요. 무조건 제가 숙이고 봐야죠.
"정확히 언제부터 유럽에 있었죠?"
슬슬 입국 도장을 찍어줄 때가 됐는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돌발 질문이 날아왔습니다. 이미 3개월 전의 일이라 저는 당황했어요.
"독일에서는 뭘 했죠? 어떤 봉사활동이었죠? 왜 그런 봉사활동을 했죠?"
지난 11월 12일, 국제 워크캠프(Workcamp)를 위해 베를린에 처음 입국했습니다. 난민 보호소에서 다국적 참가자와 함께 건물 보수작업을 하는 건전한 일이었죠. 왜 계속 지난 일을 물어보는 걸까요. 워낙 심사가 까다로운 영국이라 하니 정성껏 대답은 했다만, 제 대답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그는 대꾸조차 안 하고 자기 할 말만 계속했습니다. 그러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해댔죠.
"무비자 체류 기간 90일이 넘어요. 이렇게 되면 입국할 수 없습니다."
우선, 약간은 복잡한 유럽 솅겐 조약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볼게요.
이 조약에 가입한 유럽 국가를 여행할 때는 90일간 비자가 필요 없어요.
그런데 저는 유럽 100일 여행을 계획했고, 초과하는 10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했죠.
90일보다는 100일 여행이 좀 더 그럴싸하게 들리잖아요? 하하
방법은 있습니다. 솅겐 조약에 해당되지 않는 나라를 여행하면 돼요.
영국은 그런 나라였고요.
(혹시 지금 유럽 100일 이상 장기 여행을 준비하신다면, 다시 한번 정책을 알아보세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대한민국 외교부에 전화를 걸어서, 이 정보가 확실한지 재차 검증했어요.
비자에 관해서는 절대 문제가 생길 수 없었죠.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체류 기간을 초과했다니.
"작년 11월 12일에 입국했죠? 그러면 영국을 떠나기로 한 2월 20일, 이미 90일 체류 한도가 초과합니다."
"영국은 솅겐 조약에 가입하지 않았잖아요. 제 여행은 총 100일이고요. 3주 정도 영국에 있어서, 90일 이상 솅겐 조약국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답답한 양반아!)"
"그럴 수 없어요"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그는 연신 그럴 수 없다는 말만 거듭 반복했어요.
"후. 좋아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봅시다. 유럽에 언제 어디로 입국했죠? 그러고 나서 어디를 갔죠? 영국에 오기 전에 정확히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했죠?"
아니, 지금까지 잘 대답했는데, 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지?
이미 10분 이상 심사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제 뒤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악명 높은 입국 심사를 멀찌감치 구경하는 다른 관광객들로 차곡차곡 밀려있었죠. 그들은 아마 저를 보면서 '나도 저 동양 남자처럼 오래 걸리지 않겠지?' 했을 겁니다.
"그럴 순 없어요. 그렇게 여행해서는 안 돼요"
아마 그 심사관은 제가 단순히 90일 한도를 피하려고 영국에 잠깐 들린 줄 알았나 봅니다. 일종의 편법으로. 일종의 눈속임으로.
그렇지만 저는 외교부에 전화까지 해가면서 완벽하게 준비했습니다. 이건 편법이 아니라 합법입니다. 자신 있었어요. 틀린 사람은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라는 것을.
결국 심사관은 마지못해 입국 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이렇게 여행하면 안 돼요."라는 마지막 힐난과 함께.
입국 심사만 15분 정도 걸렸습니다. 그동안 등이 따끔거렸어요. 하필 입국 심사대 수도 부족했던 터라, 저를 아주 그냥 병목현상의 유발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서 있었던 짧은 순간은 런던에 대한 첫인상을 완전히 짓밟아버렸어요.
신사의 나라는 개뿔.
예기치 못한 고생에 정신 차리기 힘들 무렵, 스위스 루이스네 집에서 만났던 영국인 천재 요리사 안드레아스에게 이 일을 하소연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녀석, "뭐? 세상에. 내가 대신 진심으로 사과할게. 영국 사람의 무례한 태도를 용서해줘."라며 답장을 보냈습니다.
비록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푸대접을 받았지만, 앞날은 두고 볼 일입니다. 안드레아스 같은 영국인도 분명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