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일지 4
교사들 사이에는 “진짜 좋은 선생님은 명예퇴직을 선택한다”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돈다. 정년을 앞두고도 수업을 어려워하는 아이를 쉬는 시간마다 불러 다시 가르치는 노교사의 뒷모습을 볼 때면, 저게 바로 닮고 싶은 진짜 교사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라는 조직 안에는 그 반대의 길, 즉 오로지 ‘승진’이라는 괴물에 잡아먹힌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참 투명하다. 본인은 화장실을 엉망으로 쓰면서 학생이 그러면 누구보다 불같이 화를 내고, 공과 사의 경계가 무너져 남의 물건을 제 것처럼 쓴다. 심지어 본인이 힘들다며 이미 약속된 수업을 못 하겠다고 애처럼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악은 단연 ‘강약약강(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함)’의 표본들이다.
내가 모시던 한 중간 관리자가 그랬다. 그는 실력이 뛰어나 장학사 발령을 앞둔 우리 부장님을 몹시 무서워했다. 부장님께 화를 내고 싶은데 감히 그러지 못하니, 그 화살은 늘 만만한 나에게 돌아왔다. 그는 수시로 나를 불러 세워두고 부장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나에게 쏟아냈다. 때로는 입에 담기 힘든 육두문자가 섞여 나왔다. 나는 그 앞에서 그저 죽은 듯이 서 있어야 했다.
기간제 교사라는 나의 위치. 그는 채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어른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책임감도 컸다. 결국 그 굴레들 때문에 나는 매일 아침 ‘욕설 배달 서비스’를 받아야 했다.
어떤 날은 아침부터 장학사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더니, 조례 가봐야 한다며 일어서는 나를 굳이 다시 불러 세워 부장님 욕까지 얹어주었다. 그 1년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몸속에 사리가 생길 지경이었다.
그 지옥 같은 시간을 지나오며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절대로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저렇게 추한 권위 뒤에 숨지는 말아야지.
최근 이사를 하며 짐을 정리하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이 써주신 가정통신문을 발견했다. 반듯한 글씨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ㅇㅇ아, 넌 세상을 많이 아는구나. 그런데 실력을 키우렴. 세상에 너를 돕는 사람은 없단다. 결국 네 실력이 너를 돕는단다.”
그 문장을 읽는데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 비록 기간제라는 이름으로 불안한 줄타기를 하던 시절이었지만, 내 분야에서만큼은 최고가 되려고 발버둥 쳤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그때의 나를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잘 자라 있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무례한 관리자 밑에서도 내가 끝내 무너지지 않는 건, 언제든 내 실력을 믿고 이곳을 떠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은 단순히 돈을 벌어다 주는 수단이 아니었다. 나쁜 사람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내 존엄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패였다.
이제 나는 안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부당한 대우를 참지 않아도 될 만큼의 실력을 쌓았고, 더 이상 저런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이다. 최악의 어른들을 보며 배운 역설적인 교훈이다. 실력을 키워라, 그래야 너를 지킬 수 있다. 그 방패 덕분에 나는 오늘도 내가 원하는 교실을 스스로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