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모 내집마련기12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여전히 망설여진다. 기억의 실타래를 풀다 보면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은, 성인이 된 직후 나를 휩쓸고 지나갔던 거친 이사의 기록들이다.
누군가에게 이사가 새로운 시작이나 설렘이라면, 나에게 이사는 생존을 위한 패퇴이자 뿌리째 뽑혀 나가는 고통에 가까웠다.
스물한 살, 대학교 2학년이었던 해를 잊지 못한다. 당시 고3이었던 동생과 나는, 문자 그대로 ‘망했다’는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체감해야 했다. 엄마는 지인과 함께 ‘밭떼기’ 사업을 하셨다. 농작물이 자라고 있는 밭을 통째로 사들여 수확한 뒤 경매장에 넘겨 수익을 내는 일이었다. 사업을 위해 운전면허증은 없지만 트럭을 샀고 지인과 나름 열심히 잘 해나가는 것같았다. 첫해에는 광양 밤 수확이 잘 되어 큰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성공이 독이었을까, 아니면 운이 다했던 것일까.
다음 해 야심 차게 시작한 양파 농사는 기록적인 풍년이었다.
풍년은 농부에게 축복이어야 하지만, 유통을 하는 이들에게는 재앙이 되기도 한다. 공급이 넘쳐나니 가격은 폭락했다. 우리가 사둔 양파는 땅값은커녕 수확 인건비조차 건지기 힘들 만큼 헐값으로 떨어졌다. 제대로 된 저장 시설조차 없었기에 가격이 오를 때까지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결국 막대한 손해는 고스란히 빚이 되었고, 동업하던 지인은 소리 소문 없이 잠적했다. 모든 채무는 엄마의 몫으로 남았다.
그 혼란 속에서 더 아픈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장학금을 받고, 선배들에게 책을 물려받으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하던 나였다. 엄마는 내 대학 생활에 단 한 푼의 학비도 보태지 않으셔도 되었었다. 입학 때 쥐여준 30만 원이 든 체크카드가 전부였고, 나는 2년 동안 그 카드로 5만원짜리 겨울 점퍼 한 벌을 산 게 전부였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사이, 내 명의로 학자금 대출이 가득 차 있었다. 엄마는 딸의 미래를 담보로 자신의 사업 자금과 생활비를 조달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빚쟁이가 되어 보일러실 옆 단칸방으로 쫓기듯 들어갔다. 새벽마다 기름 냄새가 코를 찌르고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1층 방이었다.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집. 애초 사람이 살기 위해 만들어 방 같지 않았다.
고3이던 동생은 수능을 매우 잘봤다. 똑똑한 탓도 있었지만 열심히 공부한 덕이었다. 대학은 합격!
그러나 등록금이 부족했다. 국립대에 다니던 나를 기준 삼아 망하더라도 등록금을 빼놓았다며 꺼내 놓은 돈은 사립대를 보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저기 손을 빌려 돈을 마련했지만 50만 원이 부족했다.
엄마가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동생에게 "정말 고생한 것은 알지만 1년만 더 고생하자. 언니가 내년엔 꼭 대학 보내줄게."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친가와 외가에 고개를 숙이며 돈을 빌렸고, 막내 외삼촌에게 마지막 50만 원을 빌려 동생을 간신히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집이 망하고 휴학을 한 뒤 해군 골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동이 트기도 전에 출근해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고된 노동이었다. 육체는 비명을 질렀지만 ‘돈을 번다’는 감각이 나를 버티게 했다. 내 손으로 번 돈으로 동생에게 얼마간의 용돈을 쥐여줄 수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삶은 냉혹했다. 어느 날 퇴근해 돌아온 단칸방에는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엄마도 모르는 빚이 또 있었던 것이다. TV, 냉장고, 몇 안 되는 낡은 살림살이조차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었다.
엄마는 그 와중에도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 해맑았다. 내가 고생해서 모은 돈을 몰래 꺼내 외할머니께 드리는가 하면, 어느 날은 상의도 없이 새 집 계약을 마치고 이사를 결정해버리셨다. 새로 옮긴 2층 집은 햇볕이 잘 들었다. 하지만 기쁨보다는 서운함과 배신감이 앞섰다. 내 삶은 이미 휴학으로 멈춰 섰고, 새벽마다 일터로 나가는 처지였는데 내 통장까지 마음대로 손을 댄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시절 가장 부러웠던 풍경이 하나 있다. 새벽 3시나 4시쯤, 일터로 향하는 길목에 있던 감자탕집 풍경이다. 그 안에는 밤새 해장술을 기울이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한때는 저들처럼 걱정 없이 웃던 시절이 있었는데. 꽃다운 스물두 살에 나는 왜 이토록 지독하고 버거운 삶을 견뎌야 하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엄마는 곧 수원으로 떠나셨다. 삼성반도체 공사 현장에 취업이 된 것이다. 엄마는 먼저 원룸을 얻어 올라가셨고, 나는 연고도 없는 포항에 홀로 남겨졌다. 하지만 혼자 버티는 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내 의사와 상관없이 다시 엄마가 있는 수원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해남에서 포항으로, 다시 수원으로. 그해 11월까지 나는 정확히 네 번의 이사를 했다.
내 삶의 터전은 1년 사이에 네 번이나 뿌리째 뽑혔다.
어딘가에 오래 머무는 일은 나에게 참 낯선 감각이다. 돌이켜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 산 집이 지금 내 이름으로 마련한 집에서의 6년이다. 그전까지 내 삶은 늘 유랑하는 나그네 같았다. 뿌리 없이 흘러가는 사람처럼 살다 보니 학창 시절 친구도 거의 남지 않았다. 늘 ‘언젠가 헤어질 사람들’이라고 선을 그으며 지내다 보니 관계는 깊어지지 못했다. 내 의지로 선택한 것이 거의 없던 시절, 나는 그저 거대한 파도에 떠밀려 다니는 조각배 같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 아이들만큼은 전학 없이 한곳에서 단단히 뿌리 내리게 해주고 싶다는 갈망이 생긴 것은. 친구를 사귀고, 익숙한 골목의 풍경을 기억하고, 내가 누리지 못한 그 평범한 ‘지속성’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 마음 하나로 신도시 안에서도 세 번의 월세와 전세를 전전하며 버텼고, 마침내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돌고 돌아 이제야 나는 정박했다. 흘러다니는 나그네 같던 삶이었지만, 내 아이에게만큼은 삶의 터전이라는 든든한 뿌리를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이 집의 벽지 한 장, 창문 너머의 풍경 하나가 나에게는 단순한 부동산 이상의 의미다.
그것은 떠밀려 살던 한 여자가 비로소 자기 삶의 키를 잡고 내린, 가장 간절한 닻이기 때문이다.
* 이 이야기는 미혼모의 집 마련과 생존을 기록한 연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