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 어머님은 왜 나를 마트로 내쫓으셨을까

미혼모 내집마련기 번외

by 누드빼빼로

설날이면 늘 시댁으로 향했다. 남편의 빈자리는 컸지만, 나는 꿋꿋하게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며 차례상을 준비했다. 내 곁에는 엄마와 여동생뿐이었기에, 아들 J에게 남자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는 나름의 ‘큰 그림’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와 삼촌, 여러 친척이 모이는 그곳에서 아들이 남자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느끼며 자라길 바랐다.

​남편 없이 홀로 시댁에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나를 마냥 환영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그곳에서 자고 웃으며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매 순간이 고역이었다. 주변에 남자라곤 없는 나에겐 아빠 대신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아들이 멋진 남자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로 묵묵히 버텼다.

​어느 날은 집안에 식용유가 뻔히 있음에도 어머님은 굳이 심부름을 시키셨다.

"식용유가 부족할 것 같으니 사 오너라."

심지어 근처는 비싸니 멀리 있는 마트까지 다녀오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추운 겨울날,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찬바람을 뚫으며 식용유를 사러 가는 길은 말할 수 없이 서러웠다. 어느 추석에는 시내 한복판, 아파트가 즐비한 번화가에서 송편에 찔 때 넣을 솔잎을 따오라는 미션을 주시기도 했다. 할 일은 산더미인데 자꾸 밖으로 돌리는 어머님이 야속하기만 했다.

​작은댁 동서가 들어온 뒤로 이런 심부름은 부쩍 늘었다. 남편이 없어서 나만 만만하게 보시는 걸까, 내가 없는 사이 뒷담화라도 하시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남편이 없으니 나를 막아줄 이도 없다는 자격지심에 마음은 자꾸만 아리고 서글퍼졌다. 20대의 나는 그저 그 상황이 서럽기만 했다.

​십 여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문득 그날의 풍경들이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어머님께서 늦잠꾸러기인 나를 깨우는 시간은 늘 작은어머님이 도착하기 딱 5분 전이었다. 내가 서러운 마음으로 식용유를 사러 마트를 헤매는 동안, 정작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전 부치기는 이미 어머님 손에서 끝이 나 있었다. 도심 속 솔잎 찾기는 기름 냄새 진동하는 주방에서 나를 탈출시켜 아들과 산책이라도 다녀오라는 어머님만의 비밀스러운 배려였던 것이다.

​작은댁 며느리는 늘 전을 다 부칠 때쯤 와서 밥만 먹고 쏙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2~3년을 보낸 뒤 당신의 며느리만 고생하는 것을 보기가 안쓰러우셨던 어머님께서 내린 특단의 조치였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대놓고 쉬라고 말하면 다른 이들의 눈총을 받을까 봐, 어머님은 그렇게 심부름이라는 핑계로 나를 보호하고 계셨다.

​겉으로는 무뚝뚝하셨지만, 어머님은 남편 없는 나와 내 아들을 당신만의 방식으로 지켜내고 계셨다. 지금도 명절 즈음이 되면 그 겨울의 식용유 심부름과 솔잎 심부름이 떠오른다. 그땐 너무나 추운 미션이었지만 그것은 참으로 따뜻한 숙제였다. 그 투박한 사랑 덕분에 나는 그 모진 계절들을 무너지지 않고 건너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