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무기력하지만 나름 평안한 날을 보내던 중, 친정 부모님께서 사시는 아파트 내 엘리베이터를 교체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19층에 사시는 데 7월 말부터 50일 정도 공사를 해야 한다고. 딸만 다섯을 두신 부모님은 딸 집이 불편할 것 같다며 그냥 그곳에 계시겠다고 하셨다. 급하게 병원에 가실 일이 있을 수도 있을 텐데. 잠시 계실 곳을 알아봐도 마땅하지 않았다. 공사 시작이 임박해서야, 큰 아이의 진심 어린 설득으로 우리 집에서 지내시기로 결정을 하셨다.
딸들 집에 계시는 것을 망설이는 부모님 때문이었을까? 나는 기꺼이 며느리가 되기로 했다. 아들이 없는 부모님에게 아들 집에서 사는 것 같은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방 하나를 비우고, 화장실을 비롯해 신발장, 화장대 등 부모님 물건이 들어갈 자리를 마련했다. 방충망을 손보고, 식탁 겸 다용도로 사용될 테이블을 거실에 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부모님 짐을 옮겼다. 여름이라 짐이 별로 없다던 부모님의 짐은 두 차를 가득 채웠다. 여러 종류의 김치와 밑반찬, 냄비까지 챙기셨다. 남편이 출근하면 느긋하게 지내던 나는 새벽잠 없는 부모님 생체리듬에 맞춰 새벽 일과를 시작했다.
아침마다 강판에 감자를 갈고 토마토와 양파를 썰며 부지런을 떨었고, 부모님께 대접받는 느낌을 드리기 위해 되도록 개인 접시로 음식을 나눠 담았다. 과일까지 개인 접시에 담으면, 나름 그럴듯한 아침 상이 차려졌다. 제대로 아침을 못 먹던 남편이 제일 좋아했다. 양쪽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이른 아침의 바람과 햇살. 이른 아침의 여유는 정말 오랜만이다. 엄마가 담가 오신 물김치와 깍두기를 다 먹고 나서는 담그는 법을 배웠다. 언젠가 엄마가 안 계시면 그리울 그 맛을 위해.
부모님도 우리 집구석 구석을 살피시며 도움을 주고 싶어 하셨다. 페인트 칠이 벗겨진 곳을 칠해주시고, 여러 번 켜야만 불이 들어왔던 전등도 고쳐 주셨다. 이런 과정에서 몸이 말을 안 듣는다는 아빠의 지시에 따라 조수 노릇을 하며 처음으로 전동드릴을 잡아봤다. 마침 올림픽 기간이어서 아빠와 올림픽을 보며 함께 웃었고, 부모님을 모시고 여름휴가도 다녀왔다.
19층에 두고 온 화분을 걱정하시는 엄마와 함께 19층을 걸어서 올라갔다 왔을 때는 뿌듯하기까지 했다. 와~ 이게 가능하구나~
서로 삶의 방식에 대한 낯섦과 이해를 이뤄가며 짧고도 긴 한여름의 50일이 지나갔다.
그동안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언니는 동생네 있는 부모님이 적적하실까 봐 자주 먹거리를 들고 와서 말동무가 되어줬고, 동생들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부모님과 나를 챙기면서 우리는 풍족한 시간을 보냈다.
조금은 분주하고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부모님과 같이 지내면서 부모님의 육체적 불편함과 마음을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또한 살면서 처음으로 요리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손수 해 드시다가 누군가 해주는 밥을 드시는 기쁨의 표현이리라.
나 또한 젊은 사람들 틈에서 치이다가 어르신들 틈에서 내가 얼마나 힘세고 젊은 사람인지 느꼈다. 살림을 잘 못해서 손님 오는 것을 싫어했던 나에게 이 시간은 다른 사람이 되어 본 시간이었다.
‘며느리는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내가 더 나이 들면 이런 순간에 이런 마음이겠구나!’
부모님이 가시고 나는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돌아보면 꿈만 같은 시간이었고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두 분 중 한 분이 안 계시는 상황을 대비한 연습 같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이 된다 해도 함께 이기에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