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 May 09. 2023

소매 끝자락만큼의 낭만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오늘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다. 결혼하신 지 60년이 다 되어가는 두 분을 보며 난 이 단어를 생각했다.  


낭만(浪漫)  

1.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2. 감미롭고 감상적인 분위기.


난 그동안 한 번도 부모님과 이 단어를 연관시켜 본 적이 없다. 아빠가 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난 이 단어. 이 단어가 생각난 건 우연이었다.




난 소매 끝이 살짝 넓어지는 옷을 좋아한다. 치렁치렁한 거 말고 손을 움직일 때 살짝 나풀거리는 정도의 소매. 현실과 상관없이 나의 상상을 나누며 웃고 떠들지만, 생각나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부터 검색하는 나의 낭만은 살짝 끝이 넓어지는 소매의 그 끝자락만큼이다. 딱 고만큼.

고만큼의 낭만은 아빠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매년 결혼기념일에 엄마에게 편지를 써 주셨다. 마지막 편지는 2년 전이다.


나의 사랑!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 감사합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에는 엄마에 대한 감사와, 병으로 무너져가는 무기력한 한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하나님 뜻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작년에 편지를 못쓰신 건 아마 장거리 여행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이셨기 때문일 거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지금 가야 한다며 울진 여행을 가기로 했었다. 변을 참지 못하는 아빠는 기저귀를 차고도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어서 아빠에게 엄청난 부담이었고 가 전날까지 고민을 하셨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작년의 편지는 여행 중 레일 바이크를 타고 함께 부른 노래로 대신하셨을 거 같다.

그리고 올해, 아빠는 손에 힘이 없어서 더 이상 펜을 쥐실 수 없다. 난 2년 전 편지의 첫 부분으로 올해 엄마에게 쓰는 아빠의 편지를 대신 보내고 싶다.

 



며칠 전, 쉬는 전날 밤의 여유로움을 즐기자고 언니를 부추겨 대공원에 갔었다. 오랜만에 간 그곳은 늦은 시간이라 인적이 거의 없었고, 넓은 공간이 우리를 위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걷다 보니 호수 앞에 커다란 반지 조형물이 나왔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나는 그 조형물 안에 들어가 누웠고, 해먹에 누운 듯 편하게 누워 바라본 하늘은 정말 예뻤다. 검푸른 하늘에 각인된 것처럼 보이는 금빛 달, 호수 건너편 불빛에 비친 연둣빛, 정지된 듯 고요한 시간.  

반지를 지나 상상의 세계로 들어간 것 같이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동물 그림의 거리를 지나, 가난한 연인들이 사랑을 고백해도 좋을 거리를 지났다. 젊은 시절 난 낭만이 1도 없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이렇게 할거 같다.

"이 길 이름이 뭔지 알아? 나에게 오는 길~ 이렇게 오면 돼. 그냥 한 걸음씩." 경쾌한 발걸음으로 사뿐사뿐 걸으며. 이게 내가 생각하는 최대한의 낭만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공원을 돌다 보니 가까이 집들이 보였다. 우린 아무 생각 없이 가고 있었고 우리가 들어온 정문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그때가 10시 20분. 11시 문 닫는 시간을 맞추느라 우린 조급한 마음으로 지도앱을 열었다. 가다 보니 바닥에 조명이 길을 밝히는 예쁜 길도 있고, 커다란 나무들이 지나가는 이들을 시중드는 것처럼 서있는 곳도 있었다. 낮에 봤으면 좋았을 텐데.

지름길을 찾다 보니 제대로 조명이 없어서 무서웠고, 무서워서 튼 음악은 너무 느리고 슬퍼서 더 무서웠다. 그 와중에도 우린 그런 음악을 튼 게 너무 웃겼고 함께여서 행복했다. 섬뜩한 느낌의 젊은 남자들이 차 앞에 서 있는 곳을 지나 11시가 다 돼서 차를 세워둔 곳에 도착했다.

살랑이는 바람과 햇살을 만끽하다가 폭풍우를 해치고 나온 느낌이었고, 그 폭풍우 안에서 뭔가 소중한 걸 본 거 같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그 공원이 엄마가 만든 꿈의 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들을 초대하기 위해 깨끗이 치우고 예쁘게 꾸며서 엄마의 낭만을 보게 한 거 같았다. 딸들이 인생의 전부였던 엄마는, 엄마가 꿈꾸는 부분들을 딸들은 누리길 바라셨을 거다. 우리가 예쁘다며, 너무 좋다며 돌았던 그 거리들 엄마가 누리고 싶고, 우리가 누리길 원했던 엄마의 꿈처럼 다가왔다.  

삶의 힘겨움에 갱년지 우울증조차 드러내지 못했던 엄마. 그곳에서 내가 느꼈던 건 엄마의 낭만이다. '이 길 이름이 뭔지 알아?'를 생각한 건 내가 아니라 엄마의 낭만이다.

공원 안 곳곳에 있던 타인들은 아마 미처 치우지 못한 기억이었을 거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누군가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을 참 좋아한다.

낭만, 우리 부모님은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하실 단어다. 난 부모님이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때 린 시절의 설렘과 엉뚱함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아무 꿈도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뭔가 꿈틀거리는 마음이 있던 그 시절의 아이가 아직도 있으면 좋겠다.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면 좋겠다.


렇게 낭만을 배워가면 좋겠다.


아~ 내가 말하는 낭만은 요즘 드라마 여기저기 나오는, 부적절한 관계 따위에 갖다 붙이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주어진 환경과 자연에서 누리는 여유와 따스한 시선이다. 근심에서 눈을 떼고 그런 낭만을 나도 너도 누리길 바라는 마음이다.

  


작가의 이전글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