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눈이 많이 온 날, 창밖으로 눈 위를 느릿느릿 가는 달팽이를 봤다. 아가의 웃음소리처럼 밝게 빛나던 눈이었는데 그날따라 빛을 잃고 회색빚으로 보였다. 눈마저 침울한 길, 그 위를 우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가는 달팽이. 전에 내게 말을 건 그 달팽이다. 겨울잠을 자야 할 시기에 뭐가 그렇게 절실하기에 몸이 상하는 것도 감수하고 움직일까? 안쓰러움에 눈물이 떨어졌다.
난 달팽이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나 보다. 그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고 너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우는 것 밖에 없어서 난 내 눈물이 신에게닿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난 이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왜 눈물은 아래로 흐를까요?
제 눈물은 당신께 닿을 수 없습니다.
위에 계신 당신께 눈물이 닿게 할 방도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눈물이 달팽이에게 떨어졌다. 주춤하던 달팽이가 웃으며 나를 본다.
"고마워. 나는 촉촉해야 더 잘 갈 수 있거든."
달팽이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눈물... 떨어지는 눈물, 누군가에게 닿는 눈물.
나는 다시 기도를 했다.
당신의 마음은 거기 계셨군요.
내 눈물이 닿는 곳, 내 눈물이 모이는 곳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달팽이에 대해 검색하고 달팽이 그림 글씨를 그리며 '그 길 위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위의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엉뚱하게 백만 원짜리 위로의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만 원이 생각난 건 아마 어떤 분의 뒤늦은 조의금 때문이었을 거다. 내게 거저 주는 사랑을 가르쳐주신 분. 내게 사랑을 흘려보내실 때 여러 가지로 너무 힘든 상황이셨다는 이야기를 최근에야 들었다. 그래도 공부 잘하고, 조용히 맡은 일 잘하는 내 모습을 보면 좋았다고 하셨다. 내가 특별히 그분을 위해 뭔가 하지 않았어도 그분에게 기쁨이 되었나 보다.
백만 원짜리 위로 글을 쓰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듣고 호호 아줌마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할 수 있는 걸로 하면 되지. 호호"
내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신 앞에서 우는 것과 최선을 다해 내 자리에 있는 것.
내가 누군가에게 시선이 간다면 그건 안쓰러움 때문일 거다. 이 글은 백만 원짜리는 아니지만 약속 어음 같은 거다. 그 누군가에게 하는 약속의 글이다.
"널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두 가지를 할게.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이제 눈물을 닦을 수 있겠지?"
달팽이에게 닿은 눈물이 웃음을 준 것처럼, 있는 모습 그대로 그분께 기쁨이 되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위로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