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렵한 턱선을 자랑하며 호기심 많고 기계체조를 잘하던 청년,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가게일을 하면서도 새벽에 축구를 하던 강인한 가장, 시니어클럽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시던 어르신. 이 모두가 나의 아빠다.
날렵한 턱선에 세월의 그을음을 잔뜩 얹고 치킨 할아버지 몸매가 되신 아빠는, 강인함을 두려움으로 대신하며 외출조차 버거운 86세의 할아버지가 되셨다. 아빠는 간암과 당뇨로 정기 검진을 받으신다. 아빠 의지랑 상관없이 걸음이 멈추질 않아 몇 번 넘어지신 적이 있다. 얼굴이 다 까지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일어나신 아빠는 외출을 두려워하신다.
다가올 죽음에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어느 순간부터 아빠는 아빠의 상장들을 벽면에 붙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엄마가 우리들 상장을 벽면에 붙여주었듯이. 아빠 방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상장들을 보면서 나는 묘한 슬픔을 느꼈다.
도배를 새로 하고 불필요한 짐을 다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손녀가 마음을 담아 아빠의 자료를 정성껏 파일로 정리해드렸다. 훗날 아빠 생각나면 언제든지 서랍에서 꺼내볼 수 있게.
너만은 너의 할 바를 다하라.
우리 집 가훈이다.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들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학교 다닐 때 가훈 전시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너무 길다고 '할바를 다하라'로 바꾸셔서 속상했었다. 우리가 중요하게 교육받은 건 앞부분이었는데.
아빠는 왜 가훈을 이렇게 정하셨을까?
이 나이가 되어 돌아보니 이건 아빠에게 하는 다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빠는 이 가훈처럼 사셨다.
친할아버지는 육사 출신의 장군이셨다. 재산이 많았지만 재혼하셔서 자녀들을 돌보지 않으셨다. 친할머니도 사고로 일찍 돌아가셔서 아빠 형제들은 증조할머니 손에 자라셨다. 아빠는 친할아버지의 사랑도, 도움도 받지 못하셨고,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했다. 기계체조도 잘하셨고, 공부도 잘하셨는데.
학창 시절이나 군대 시절 부모님이 오는 행사에 아빠는 항상 혼자였다고 한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챙겨줘서 괜찮았다고. 아빠는 모든 일에 열심이셨고 집안을 위해 잘돼고 싶었다고 말씀하신다.
아빠는 군에 있을 때 미국에 가는 과정에 선발되셨는데 건강이 나빠져서 미국에 가는 꿈을 포기해야 했던 순간을 지금도 아쉬워하신다. 새벽부터 밤까지 소처럼 애쓴 아빠의 삶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풍성한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상장들은 열심히 살아온 당신 삶을 위로하는 도구가 아니었을까? 난 상장보다 우리 다섯 딸들을 키우며 보여준 인내와 사랑에 감탄한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나의 날렵한 턱선에 세월의 그을음을 아빠 반쯤을 얹고 알게 되었으니까.
작년에, 돌아가신 친할아버지 앞으로 무공훈장 3개가 왔었다. 아빠는 좋아하시며 사진을 찍어서 우리에게도 보내셨다.
둘째인 내가 태어날 때 형편이 어려워서 엄마는 물국수로 배를 채웠다고 한다. 그때조차 도움을 주지 않으신 친할아버지. 난 살면서 한 번도 아빠가 친할아버지 원망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한 번은 들어보고 싶다. 난 친할아버지 이름으로 온 훈장을 아빠가 집어던지면 좋겠다. 미국에 못 간 걸 아쉬워하는 아빠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미국에 못 간 건 살면서 만나는 사고 같은 거였고, 아빠가 정말 속상해야 하는 건 친할아버지의 무관심이었다고. 군에서 엉덩이에 피가 나도록 이유도 없이 맞으면서 누구 한 사람 위로해줄 사람이 없었던 아빠, 부모님이 안 오셔서 다른 부모님의 관심을 받은 어린 아빠는 절대 괜찮지 않았다고.
물론 나는 아빠에게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말할 수 없을 거 같다. 아빠 힘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을 테니까.
아빠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난 남 탓하고 환경 탓하는 걸 싫어한다. 잠시 멈추고 나서야 알았다. 나의 연약함은 탓할 수밖에 없는데 애써 하면 안 된다고 내 안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는 걸. 앞으로도 뭔가를 탓하며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래도 그냥 연약함을 연약 함대로 풀어놓으면 좋지 않을까?
우리 모두 너무 어려서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상처를 이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보면 좋겠다. 그래야 놓아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