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머무는 믿음의 자리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새긴 돌판을 주시기 위해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신 장면입니다.
구름이 산을 덮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머뭅니다.
백성은 산 아래에 머물고,
장로들은 중턱에,
여호수아는 조금 더 가까이,
그리고 모세는
그 모든 사람을 뒤로하고 구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곧바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그는 여섯 날 동안 침묵 속에 머무릅니다.
오늘은 모세가 머문 침묵의 시간과,
그 침묵을 견디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이 여섯 날의 침묵은 모세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만약 내게 이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머물 수 있을까요?
‘침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종종 듣습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여섯 날도 그런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물도록 이끄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침묵과 기다림의 시간을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시간은 우리의 조급함을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수 있도록 마음을 정결하게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일 것입니다.
그 기다림은 단순한 대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고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응답이었습니다.
이 여섯 날은 계시가 지연된 시간이 아니라,
계시를 위한 준비의 시간이었으며,
불확실성의 시간이 아니라 믿음의 신뢰를 요청하는 자리였습니다.
모세를 그렇게 준비시키신 하나님을 떠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산 아래에 있던 백성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가 보이지 않는 시간이
길고 두려운 침묵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 조급함은 불안을 키웠고,
결국 그들은 손으로 신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기다렸어야 했을까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우리가 다 준행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을 몰라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에 이끌려 무너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의 두려움은 두 사람에게,
또 세 사람에게로 번져 갑니다.
그들이 각자의 불안을 나누며 서로를 믿음으로 격려할 수 있었다면,
그 침묵의 시간도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도 어쩌면 그들과 비슷한 모습은 아닐까요?
그 침묵 앞에서 흔들리던 그들처럼,
지금의 우리도 어쩌면 비슷한 자리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더 이상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며,
말씀 위에 서서 은혜 가운데 살아갑니다.
다른 것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주신 은혜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기다림입니다.
주님이 기다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 때를 고집하지 않고,
제 방식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삶의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습니다.
당신의 주변엔
슬픔이 흥건히 고여 있습니다
당신의 눈은
아름다움에 목마릅니다
그런 당신 머리 위로
햇살이 고운 빛을 비춥니다
햇살에 물든 당신의 아름다움이
제 눈에 머뭅니다
제 모습도
그런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더는 아름다움에 목마르지 않도록
왜곡된 시선
이 그림은 불안정한 선과 분열된 시선 속에 자리 잡은 눈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위쪽의 눈은 방향을 잃은 시선, 불안을 담고 있고, 아래쪽은 뒤틀리고 왜곡된 또 하나의 눈이 자리합니다.
그것은 결국 ‘우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불안을 느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신.
눈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시선이지만 진리를 향하지 않는 상징.
그 우상은 인간의 불안과 조급함이 형상화된 신의 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