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4. 니느웨에 말씀을 선포한 요나와 나훔

그 이름의 의미

by HAN

비가 옵니다.
내일은 더 많은 비가 올 모양입니다.
이 비가 누군가에게는 단비고,
누군가에게는 슬픔,
또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일 것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도 그렇지 않을까요.
한 사건이 모두에게 같은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으니까요.


오늘 말씀 본문은 요나서 1장이었습니다.


요나의 말씀 선포로 잠시 죄악에서 돌이켰던 니느웨는
다시 죄를 향했고,
150년 후, 나훔의 말씀 선포를 끝으로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요나서는 열린 결말로 끝납니다.
잠시,
요나가 먼 훗날 그 멸망의 순간을 보았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질없는 질문이겠지요.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질문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니느웨에 말씀을 선포한 요나와 나훔의 이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요나와 나훔, 그 이름의 의미 손글씨




요나서 1장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들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의 이름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종종 회복과 자비의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비둘기는
심판 이후 새로운 땅, 새로운 기회를 전하는 존재였습니다.


요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그 또한 자비의 가능성을 품고
심판을 향해 가야 했던 하나님의 비둘기였습니다.

그가 전한 말씀에 니느웨는 잠시 돌이켰고,
하나님은 멸망을 유예하셨습니다.


그로부터 150년이 흐른 뒤,
다시 죄악에 물든 니느웨에
하나님은 이번에는 나훔을 보내십니다.


나훔의 이름은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이름과는 다르게, 그는 멸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앗시리아의 압제 아래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의롭고 신실한 위로였습니다.


요나는 자비의 사자였고,
나훔은 공의의 위로자였습니다.


나님은 두 사람을 통해

자신의 성품—오래 참으심과 반드시 이루시는 공의—를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은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각자의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 연약함은
누군가에게는 ‘장소’,
누군가에게는 ‘사람’,
또 누군가에게는 ‘일의 종류’ 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 커서 온전히 헤아릴 수 없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성품은 변함이 없습니다.


자비와 공의,

오래 참으심과 신실하심.
그 속에 우리는 오늘도 살아갑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의 사랑은
너무 커서,
저의 작은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때론 그 사랑이
저를 벼랑 끝에 서게 합니다.


그곳에서 저는
눈물을 바라봅니다.
그 눈물은
주님의 눈물이고,
제 눈물이며,
누군가의 눈물입니다.


그 눈물이
주님의 사랑을 닮게 하소서.
그 눈물 속에서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전하는 마음

살이 찢기고,
혈관의 틈새를 타고
붉은 피가 새어 나왔습니다.


그 사이,
거룩한 손이
아프게 하는 것들을
조용히 끄집어내셨습니다.


이제는,
그 아픔들이
남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손이
도닥인 자리마다
방긋 웃는 꽃이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그림

자비와 회복을 안고


이 그림은

한 사람의 고통 앞에 머무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그려낸 기도의 결입니다.

자비와 회복을 안고


왼편에 번지듯 피어난 꽃은
무언가를 감싸 안고 싶었던 마음처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검은 선은 그 곁을 에워싸며
자비인지, 침묵인지, 기도인지 모를 언어로 말을 겁니다.


어딘가로 날아가지도,
무너지지도 않은 그 자리—
바로 그곳에
나는 조용히 머물러 있었고,
하나님의 시선은
그 사람에게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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