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이름 위에 임한 구원
강한 바람에 꽃잎이 흔들립니다.
가냘픈 꽃잎이 바닥에 닿지 않게
또 다른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건 무너짐과 회복 같습니다.
쓰러짐과 일으키심,
포기됨과 다시 불려짐,
그리고 외면됨과 다시 들려오는 이름처럼.
오늘 묵상한 본문은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이 그를 만나신 곳은 여리고입니다.
‘향기로운 도시’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한때 무너지고 저주받았던 곳입니다.
그곳 한가운데,
사람들에게 배신자처럼 여겨지던 삭개오가 있었습니다.
‘의로운 자’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그 이름대로 살지 못했던 사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름을 다시 불러주심으로써,
그가 잃어버렸던 이름의 의미를 되찾게 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 19:5)
이 말씀은 단지 초청이 아닙니다.
그 순간, 반드시 이 사람에게 구원이 임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나무에 오르기 전부터 그를 보고 계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시선은,
사람의 조건이나 열심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그날, 삭개오의 이름은 다시 불렸고,
그 집에는 구원이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도착했습니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안다고.
네 마음을 안다고.
네 상황과 형편을 안다고.
이제 괜찮으니까
내려오라고.
나와의 거리를 좁히라고.
네 안에 거하겠다고.
오늘.
그리고 오늘.
또 오늘.
그분은
계속해서 ‘오늘’
내게로 오십니다.
당신에게 이곳은 너무 적막합니다.
떠들썩한 시장의 소음은
당신에게 닿지 않을 겁니다.
소리에 민감한 당신에게는
고통일 뿐이겠지요.
당신을 위해 시장에 가야겠습니다.
낡은 오르골을 사 와야겠습니다.
그 소음을 뚫고,
당신이 좋아하는
고운 소리가 나올 것입니다.
그 소리는
정적 속에 비추이는 빛과 같습니다.
그 고운 소리가
당신의 마음도
따스이 덮으면 좋겠습니다.
팔짱을 끼고 말없이 서 있는 세 사람.
서로 말은 없지만,
각자 안으로 움츠려 있는 그 순간,
무언가 설명되지 않는 고요함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림 속의 침묵은
마치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의 내면 같습니다.
팔짱 낀 채 주저하고,
감춰진 채 바라보지만,
그 안엔 이미 예수님의 시선이 머물고 있습니다.
그 시선은
빛처럼 말없이 스며들고,
그 빛은
무너졌던 이름과 삶의 벽을 조용히 비춥니다.
말이 없어도
그럼에도 비추는 빛은 있습니다.
삭개오에게도,
우리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