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아티스트 #일본편 ③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1929~)는 최근 루이비통과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며 파리, 뉴욕 등의 명품 거리를 물들인 바 있다. 그가 그린 'Pumpkin(LPASG)'(2013)은 2021년 12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화로 94억 원 이상에 낙찰돼 당시 작가 경매 최고가를 경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작품 세계를 유명세와 높은 가격만으로 설명하기엔 아쉽다.
그는 평생에 걸쳐 무수한 점을 그렸다. '점'이라는 일관된 세계는 거대한 무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운동한다. 파도처럼 굽이쳤다가도 사그라들고, 세상을 집어살킬 듯 확장되었다가도 소멸할 듯 하나로 모인다. 세계가 열광한 호박과 무수한 점. 그 사이에 가려졌던 야요이 쿠사마를 삶에 관한 키워드별로 살펴본다.
점에 대한 강박은 야요이 쿠사마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쿠사마는 1929년 일본 마츠모토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닥친 전쟁과 폭력적인 사회 분위기, 방치와 훈육을 반복하는 가족 등 불안한 환경은 쿠사마에게 상처로 남았다.
어린 쿠사마는 집안에서 빨간 꽃무늬 패턴이 새겨진 식탁보를 보다가 천장으로 시선을 돌려도 창문 위와 기둥까지 같은 무늬가 번져나가는 듯한 환각을 겪는다. 패턴은 방, 몸, 세상 전체에 이르기까지 퍼져나갔다. 이렇듯 열 살 무렵부터 겪었던 환각증은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이자 '작품'의 모티브가 된다. 공포를 그림으로 재현하게 된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점'은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꼽힘과 동시에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요소다. 점은, 모이면 어떤 형태로든 이어질 수 있기에 무한함을 함축한다.
특히, 쿠사마는 점을 수직적이거나 수평적인 방향으로 일정하게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모으거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흩트려 강한 에너지와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평면 위에 그려진 단순한 패턴이 아니라 그만의 철학을 담은 우주로 확장되는 것이다.
점은 사슬처럼 엮인 패턴으로 연속적인 짜임을 보여준다. 점을 잇다보면 리듬이 담긴 그물이 된다. '그물(Net)' 시리즈는 1959년부터 주목을 받았다. 뉴욕 브라타 갤러리(Brata Gallery)에서 첫 개인전으로 거대한 '무한 그물(Infinity Nets)' 5점을 공개했던 것이 그 시작이다. 일본을 떠나 뉴욕으로 온 지 1년 반만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힙의 중심'인 곳에 등장한 무한 그물은 미니멀리즘의 개척자와도 같은 비평가이자 아티스트 '도널드 저드'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무한 그물'은 멀리서 보면 마치 캔버스가 흑백으로만 뒤덮여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보는 사람이 더 가까이 가야만 하는 능동적인 감상을 유도한다. 막상 다가가면 그 크기에 먼저 압도된다. 그리고 반복적이면서도 불규칙한 패턴은 평면을 넘어 입체감을 느껴지도록 해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끊기지 않는 선들은 흔들리는 거미줄처럼 보인다.
사실 야요이 쿠사마를 대표하는 모티프 중 하나는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호박'이다. 호박은 회화, 조각, 드로잉, 설치 작품 등 다양한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티스트는 호박의 유머러스한 형태와 따뜻한 느낌을 사랑했다고. '호박을 향한 나의 영원한 사랑(All the Eternal Love I have for the Pumpkins)'이라는 작품 제목만으로도 그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울퉁불퉁한 호박 위에서 큰 점과 작은 점은 조화를 이루어 유쾌한 에너지를 전달한다.
거울은 실제와 가상을 넘나드는 매개체이다.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어디까지가 내가 딛고 있는 현실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기댈 곳 없는 광활한 공간에 내던져진 것 같기도 하다.
거울방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부순다. 감상자가 그 무한함을 경험할 수 있게끔 만들며, 사람의 내면에 늘 도사리는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도록 이끈다. 쿠사마의 거울방은 '나'조차 잊어버리는 '자기 초월적 세계'로 이르는 체험을 할 수 있는 방이다.
'거울'은 무한한 확장을 함축하는 '점'과도 통한다. 그래서 '점'은 확장을 거쳐 결국 자기로부터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길인 셈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 '내가' 집착하는 감정과 말에서 멀어지는 건 나를 잊어가는 '자기 소멸'에 다가가는 것과도 같다.
야요이 쿠사마의 의도는 '소멸의 방'이라는 관객 참여형 작품으로도 잘 드러난다. 무수한 점을 찍다보면 가운데에서 시작했든, 모서리에서 시작했든 나중에는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모르게 된다. 작은 귀퉁이에서 출발한 점은 점차 모든 사물과 세상을 뒤덮으며 기존에 있던 방의 모습을 소멸시킨다.
나의 삶은 수 천개의 점들 속에서 길 잃은 단 하나의 점이다 - 야요이 쿠사마
*표지 : 'Infinity Mirrored Room', ©Tate Modern
글 원윤지
※ 누적 회원 13만 명을 보유한 아트테크 플랫폼 T사 앱 매거진과 블로그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게재본과 일부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