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너무 풍족해져 어쩌면 더 지루해졌는지 모른다. 리모컨을 들고 100개가 넘는 TV 채널을 무한히 돌려본 적, 넷플릭스 추천 콘텐츠를 아무리 돌려봐도 볼만한 것이 없어 그냥 TV를 꺼버린 적이 있었을 것이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정주행 하며 나도 모르게 벌써 20년 전이 되어버린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라희도와 나는 동갑이다. 몇 장밖에 없던 CD와 동네 책방에서 빌린 만화책,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소설책 몇 권이 전부였지만 그것들이 있어 매일 밤이 즐거웠던 그 시절. 들리지도 않는 Backstreet Boys의 영어노래 가사를 소리 나는 대로 받아 적어 따라서 흥얼거리고, '풀하우스'와 '언플러그드 보이'를 빌려와 반납 날짜가 될 때까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고, 친구와 교환일기를 쓰고도 할 말이 남아 또 편지를 쓰던 밤. 지금은 남편이 가입해 놓은 온갖 OTT 계정과 YouTube 프리미엄 계정이 있지만 보고 싶은 영화도 듣고 싶은 음악도 없다. 가끔 음악을 듣고 싶을 땐 주구장창 옛날 음악만 듣는다.
콘텐츠를 소비한다는 관점에서 그 시절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만화도, 영화도, 음악도 모든 콘텐츠가 디지털화되어 있는 지금 시대의 콘텐츠 경험은 '눈'과 '귀'로만 하는 한정적인 경험이다. 만화책과 비디오테이프 혹은 DVD 그리고 CD 등 물성이 있는 매개체를 통한 콘텐츠의 경험은 몸이 닿는 '촉각'이 더해진다. 손으로 재질을 느끼고 그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와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 한 권에 담긴 이야기, CD 한 장에 담긴 열곡 남짓의 음악이 한정적이어서 더 소중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나의 소중한 것은 정말 작은 것이었다. 많이 가졌다고 무조건 즐겁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너무 많아서 나의 영혼이 담길 곳은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뭐든지 적당한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