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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정일official Oct 21. 2024

너의 지구

윤정일 2024

억세고 질긴 식물의 생명력을 알고 있다


큰 가지는 과감하게 부러짐을 결심했고

연두 새싹들은 아직 그 의미까진 모르는 듯하다


부러진 가지만큼 딱 그만큼이 더 자라난다


늘어진 그림자는 늦은 오후를 나타내어

점점 짙어가는 그늘로 흙 위에 올라본 시간들을 계산해 본다


늦은 오후가 지나면

그토록 올라서고 싶던 흙과 같아진 하늘에 실망하진 않을까 걱정이지만


진정 마음이 쓰이는 이유는

언젠가 알게 될

내가 제한해버릴 그의 땅과 하늘이다


커튼이라도 치는 날이면 그의 태양은 뜨지 않을 것이며

깜빡이라도 해버린다면 그의 하루는 영영 시작되지 않을 거라고


매일 아껴주는 만큼

물을 주는 만큼

정직하게 자라는 널 보며

나의 사랑에 대해 돌아보게 돼


너는 행복하니


아무리 뻗어봐도 차가운 벽에 부딪히는 심정은 어때

나의 집은 이 정도 크기뿐이라

너의 지구도 그 정도 밖에는 못해줘


이런 나여도 물을 주는 게 사랑인 걸까

너의 키가 더 커버리면 입혀줄 수 있는 옷이 없는데 말야


미안해, 나도 웬 빙하를 녹인 물을 먹어본 적은 없어

높은 산에서 캔 물에 뭐가 들었는지도 사실 잘 몰라

그래도 수돗물은 안 먹였어

내가 먹는 물 정도는 너도 먹었으면 해서


더 큰 지구로 보내주는 상상을 해


그곳은 아무리 발을 뻗어도 닿지 않는 바다를 담고 있어

대신 그곳은 너 말고도 많은 줄기들이 뿌리내리고 있고

그 끝은 사실 나도 잘 몰라


아직 나조차 자리 잡지 못한 세상이지만

너는 다르지 않을까

어쩌면 나보다 더 클 수 있지 않을까


비가 오면 잠시 쉬어야 하고

너무 뜨거우면 마르다 못해 꺾이겠지만


우린 아무도 네가 얼마나 큰 나이테를 두를 수 있는지 알지 못해

너의 이파리로 얼마나 넓은 그늘을 만들 수 있을지는 더더욱


그렇다, 어머니는 나를 많이 사랑하셨다

너의 지구도 그 정도 밖에는 못해줘
이런 나여도 물을 주는 게 사랑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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