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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해님

49산 화악산 중봉 (2022년 2월)

by Claireyoonlee

물놀이하기 좋았던 가평의 계곡은 꽁꽁 얼어붙어 하얀 포물선을 그렸다. 굽이굽이 이어진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경기도에서 가장 높은 곳, 하늘 가까운 공원에 닿는다. 밤에는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보는 ‘별빛 공원’(870m)이다. 이른 아침 우리는 반짝이는 별 대신 구름과 먼지를 뚫고 위용 있게 우뚝 솟아오른 명지산 봉우리를 보았다. 별빛 공원을 지나 화악터널을 통과하면 경기도 가평군에서 강원도 화천군으로 들어서니 이곳은 경기도의 끝자락이다.


우리는 한반도의 중심이라 "배꼽"이라 불리는 화악산으로 향했다. 화악산 주봉은 요지라서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고 대신 다음으로 높은 중봉에 정상석이 있다. 이슬람 사원 같은 둥근 지붕의 레이다 기지와 무미건조한 군대식 사각형 건물 몇 채가 성곽처럼 우람하다. 서슬 퍼런 군대의 기운이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찌르듯이 드세게 뻗어있다. 중봉 들머리로 올라가는 길은 잘 닦은 아스팔트 길이다. 한 치는 왔을 눈을 군인들이 양옆으로 깨끗이 밀어 놓았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오르기 시작했다. 차 한 대가 지나갈 만큼의 널따란 임도는 경사가 완만했다. 올라가면서 구름 사이로 명지산, 운악산, 광덕산, 석봉산, 용화산 같은 1,000m가 넘는 산이 시원하게 이어진 풍경을 구경했다. 1,500m 산을 이렇게 쉽게 올라오다니 감지덕지했다.


높은 들머리까지 쉽게 왔지만, 중봉으로 오르는 길은 험준했다. 눈이 녹으면서 미끄러웠고 수직 경사인 바위 사이로 길이 있어 곡예를 하듯이 올라갔다. 산에 능숙한 친구는 아이젠을 가져오지 않은 친구에게 한쪽을 빌려주었다. 나는 스틱을 접고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중봉에 이르니 강원도와 경기도의 산이 끝없이 이어져 아스라했다. 눈이 덮인 산은 희끗희끗한 우리 친구들 머리 같았다. 눈이 녹지 않았어도 봄기운은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무는 한껏 부풀어 금방이라도 새싹을 터뜨릴 듯했다. 우리는 산악회 버스를 타지 않고 모처럼 시간에 쫓기지 않는 것이 좋아 정상의 귀퉁이에 앉아 햇볕을 쬐었다. 태양열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온몸에 쏟아졌다. 우리는 삶은 달걀을 나눠 먹으며 이유 없이 즐거웠다. 각자 가장 맛있는 달걀 삶는 법을 진지하게 토론했다. 살림꾼들의 비법이 모두 나왔다.


소설 ≪클라라와 태양≫(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최근작) 에서 청소년 조시의 친구인 AF(artificial friend) 클라라에게 태양은 양식이다. 클라라는 자신에게 ‘자양분’이 되는 태양이 유전자 편집을 통한 '향상'을 선택한 부작용으로 허약한 친구 조시를 건강하게 해줄 것이라 굳게 믿는다. 로봇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어딘가에 폐기 처분되어서도 우정과 사랑을 사람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한다. 화악산 정상에서 햇볕을 받으면서 “해가 저한테 친절했어요. 처음부터 늘 친절했지만, 조시와 같이 있을 때는 특별히 더 친절했어요”라고 회상하는 순수한 로봇 클라라를 떠올렸다. 해는 우리한테도 순수하게 친절했다.


상록수가 없어 더 삭막한 겨울 산에서, 해는 떼를 지어 자라는 은빛 기둥의 자작나무에도 친절하다. 겨울 햇살이 쨍하게 부서지면 나무는 은색 껍질을 가늘게 벗으며 비명을 지른다. 아주 오래전부터 쓰임새가 많아 곧 베어질 자신의 운명을 알지만, 햇볕이 주는 자양분이 아주 좋다는 듯이.


입춘이 지났어도 산은 아직 혹독한 겨울 날씨를 견디고 있다. 계곡은 하얗게 얼었고, 쌓인 눈이 바위처럼 딴딴하다. 그래도 ‘친절한’ 햇볕을 잔뜩 받아서 그런지, 봄이 바로 앞에 와 있는 것처럼 산과 함께 나도 괜스레 설렜다. 누구에게나 친절해 더 고마운 해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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