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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생각나는 얼굴

50산 비진도 섬산 (2022년 3월)

by Claireyoonlee

통영항은 말간 초승달이 헤헤거리는 새까만 새벽하늘 밑에서도 대낮처럼 환했다. 아침밥을 하는 식당, 건어물집, 횟집, 충무 김밥집 같은 가게에 하나씩 전등이 켜졌다. 우리는 계속 채워주는 시락국 (시래기를 넣은 추어탕)과 몇 가지 반찬으로 속을 든든하게 채웠다. 오랫동안 새벽 장사를 했다는 사장님의 자부심만큼 음식이 알찼다.


비진도에 가는 배를 기다리면서 시장을 둘러보았다. 이름 모를 해산물이 어리둥절해서 수조 속에서 펄떡였다. 자연산 전복 껍데기는 바위같이 두텁고 거칠었고, 광어는 모래에 하얀 배를 감추고 작은 눈을 부라렸다. 알을 밴 도다리는 살이 빠져 횟감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횟집 주인장이 추천하지 않았다. 우리는 섬에서 먹을 점심 식사로 쥐치와 숭어회를 뜨고 충무김밥을 샀다. 보배와 견줄 만큼 아름답다는 비진도(比珍島). 그곳으로 갈 준비는 완벽했다.


포근한 모랫길로 연결된 두 섬이 이어진 모양은 여자 가슴가리개 같다고도, 모래시계 같다고도 한다. 두 섬은 ‘매미’ 같이 무서운 태풍이 몰아치면 갈라지기도 한다. 배는 내항에 먼저 내리고 외항에 내린다. 내항의 섬에는 100세대 정도가 살고 있다. 그들은 두릅밭, 섬초밭에서 농사를 짓고, 흑염소를 키운다. 외항의 섬에는 선유봉을 올라가는 트래킹 코스 ’비진도 산호길‘이 있다. 서너 대의 관광버스에서 내린 승객이 많아 배에 자리를 차지한다고 잠시 신경전이 벌어졌다. 바이러스가 두려운 인간은 더 옹졸해졌다. 주홍빛으로 하늘을 밝히는 태양이 속 좁은 인간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내항에서 내려 마을을 지나 산에 올라가려는데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낚싯대를 들고 오는 주민에게 물었더니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없다고 하면서 오래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낚시만 해서 산에는 가본 적이 없나 보다. 요즘은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다며 빈손으로 돌아오는 낚시꾼의 표정이 그다지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쪽빛 바다를 보며 시간을 보낸 것만도 만족스럽지 않았을까.


정말 내항의 섬 산에는 제대로 된 길이 없었다. 우리는 천둥산, 대동산을 넘어 한 바퀴 도는 길을 지도를 보고 찾아 걸었다. 들짐승이 지나가는 길인지, 밭에 가는 주민이 가는 길인지 모르겠다. 바다를 향한 작은 밭에는 섬초가 납작하게 자라고, 매여있는 흑염소가 심심한지 우리를 보고 반가워 펄쩍 뛰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천연기념물인 이파리가 여덟 개인 팔손이나무가 무리 지어 자라나 허연 꽃을 피웠다. 햇볕 좋은 곳에는 동백꽃이 수줍게 봉우리를 열어 피처럼 붉었다. 매화는 햇살이 길을 길게 낸 바다를 바라보며 하얗고 동글동글하게 피었다.


막 해산한 엄마 염소가 의연하게 서서 탯줄을 달고 있는 아기 염소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인은 태어난 지 일주일 된 새끼 염소를 안고 엄마 염소를 끌고 가려 했다. 가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티던 엄마에게 새끼의 냄새를 맡게 하자 순순히 따라갔다.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내 새끼가 곁에 있음을 알고는 줄에 묶여 타박타박 걸어가는 엄마 염소의 눈에 평화가 돌아왔다.


선유봉이 있는 또 다른 섬으로 가기 전 몽돌해변에서 잠시 쉬었다. 부드러운 햇살이 바다에 무수하게 많은 보석을 흩뿌려 놓아 눈이 부셨다. 봄이 조금씩 와서 남긴 흔적에 온 세상이 기뻐했다. 바다도 평화롭게 포근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섬초를 다듬고 있는 할머니 두 분에게 섬초를 달라고 했다. 세 단에 5,000원을 주고 친구들에게 한 단씩 나누었다. 내가 꺼낸 비닐에 덤으로 가득 채워주는 할머니의 인심이 넉넉했다. 해풍을 맞고 자란 시금치 맛이 벌써 궁금했다.


선유봉(312.5m)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은 잘 만들어져 있다. 전망이 좋은 곳에는 쉼터가 있고,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남해의 짙은 푸른색 바다가 넘실댔다. 제멋대로 자란 동백나무 터널, 대나무 숲을 끼고 길이 이어졌다. 눈을 두는 곳마다 ’보배와 견줄만한‘ 섬의 풍경이 펼쳐졌다. 미인도 전망대에서는 우리가 지나온 내항의 섬이 동그란 여자 얼굴처럼 보였다. 비진도의 다른 이름은 미인도이다. 정말 미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정오가 지나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리는 시커먼 바닷물이 철썩이는 절벽 위에서 바람을 맞으면서 회와 김밥을 먹었다. 얼마 전 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었던 물고기의 살이 달고 찰졌다. ‘노루여 전망대'에서는 사람에게 쫓기다 바다에 빠져 섬에서 사라진 노루를 생각하며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외항 선착장에는 제주도에서 비진도로 시집와 살아온 한 할머니가 섬초, 콩, 참깨를 팔고 있었다. 물질도 했다는 할머니가 직접 키운 통통한 붉은 콩을 나는 또 샀다. 진주 남강에서 상수도 물을 공급받는다, 뭍 사람들이 펜션을 운영해서 섬사람들이 하는 작은 민박은 사라졌다고 할머니가 바다를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자식들은 대처로 가고 혼자 남아 이방인에게 섬의 속 사정을 이야기하는 할머니가 안쓰러운지 친구는 관광객이 지나갈 때마다 사라고 권했다. 사람들은 해풍을 맞고 자라는 시금치의 맛을 잘 모르는지 그냥 지나갔다.

바람이 거세져서 배가 늦게 오는 바람에 통영 미륵산에 늦게 도착했다. 산행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고 높지는 않지만(458.4m) 치고 올라가는 경사가 깊어 올라가다가 도중에 포기할 뻔했다. 하지만 정상의 경치를 놓치면 후회할 것이라는 친구의 말에 악착같이 올랐다. 통영의 앞바다가 지는 해를 받아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오묘한 빛을 내뿜었고, 수십 개의 섬을 얼싸안은 미항은 부처님의 품처럼 깊고 따스했다.


섬초를 데쳐 들기름만 넣고 무쳤는데도 맛이 났다. 새끼와 함께 걸어가던 까만 엄마 염소와 평생 바다만 바라보고 살았던 해녀 할머니 그리고 눈이 부시도록 파란 바다와 고운 모래가 둘러싼 이쁜 얼굴의 섬이 섬초 나물을 먹으면서 차례로 떠올랐다. 조금 더 살 걸 그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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