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산 가조도와 산달도 (2022년 3월 마지막날)
T. S. Eliot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The Waste Land by T. S. ELIOT)이라고 했다. 사실 겨울은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느닷없이 진눈깨비가 내리고 쌀쌀한 바람이 불면 4월을 맞이하면서 팽배했던 봄에 대한 기대는 잔인하게 무너진다. 게다가 시인이 살았던 시대(1차 대전 후)와 비슷한 냉혹한 전쟁과 반목이 4월에는 유난히 극성스러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이 오래된 시의 한 단락을 떠올린다.
"가장 잔인한 달"을 코앞에 두고 남쪽 바다에 태풍급 바람이 분다고 기상청이 요란하게 알렸다. 요 며칠 동안 서울의 하늘은 짙은 연기 같은 구름으로 뒤덮여 한 줄기 햇살도 내려오지 않았다. 정말 봄은 오고 있는지 답답했다. 남해에서 시속 30km가 넘는 바람을 맞는다고 해도 그 바람으로 말끔히 씻긴 하늘이 그리웠다.
역시 땅끝까지 오길 잘했다. 버스에서 한숨 자고 일어나 차창 밖을 보니 비는 그치고 하늘은 서서히 푸른색을 찾아 대지를 비추었다. 나무는 사춘기 소녀의 가슴처럼 복슬복슬하게 부풀었고, 현란한 색의 봄꽃이 자지러지게 피었다. 비가 내려 불어난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 겨울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거제도에는 유인도 10개를 포함한 76개의 섬이 있다. 그중 몇 개의 섬은 이제 다리로 연결되어 섬인지 육지인지 정체성이 불분명하다. 가조도와 산달도는 본섬인 거제도처럼 정체성 잃은 섬에 속하지만, 섬 산에 올라가서 어디를 둘러봐도 남해의 푸른 물이 출렁이니 어찌 섬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가조도의 옥녀봉(331.9m)에는 작은 정자가, 산달도의 가장 높은 산 당골재산(235m)에는 나무 솟대가 꽂혀있는 돌무덤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당당하게 섬이라고 외치고 있다.
섬 산은 높지 않지만 완만하게 둘러 가지 않고, 정상으로 향해 직선으로 길이 나서 가파르다. 동네 사람들도 잘 오르지 않아 비 온 후 바닥은 질척였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 길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꼭대기에 서면 섬과 바다, 육지가 이어진 가슴 두근거리는 풍경을 볼 기대에 기를 쓰고 올랐다.
우리는 산길에 잔잔하게 피어있는 키가 작은 봄꽃과 풀을 발견할 때마다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탄성을 질렀다. 푸르고 앙증맞은 개불알꽃은 이제 개명해서 봄까치꽃이다. 꽃잎이 연두색 이파리처럼 납작 피어난 등대꽃, 한 옴큼 따서 맡으면 진한 향기가 풍기는 여리여리한 쑥. 꽃과 풀은 해가 비추는 곳이면 어디든지 자라 아기처럼 해맑게 웃고 있다. 나는 올라가면서 틈틈이 쑥을 따서 주머니에 넣었다. 대지의 온기를 품고 해풍을 맞고 자란 쑥은 아기 속살처럼 여리고 부드러웠다.
출판사에서 최근 제법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친구와 대기업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지금은 산에 거의 매일 출근하는 친구. 치열하게 젊음을 보냈던 그들은 그 열정과 패기로 우리나라 100대 명산을 가뿐하게 올랐다. 나는 정상을 향해 빠르게 걷는 그들을 좇아가며 뒷모습에 배인 영광과 고통, 슬픔, 그리고 희망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열심히 살았다고 뻐기는 교만도, 매일 하는 일에 대한 태만도 없다. 그 많은 산의 정상에서, 물결처럼 흘러가는 능선과 제멋대로인 구름, 가끔은 섬을 뚝뚝 떨어뜨린 바다를 보면서 무슨 교만이나 태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사소한 기쁨이나 짙은 슬픔에 아랑곳하지 않고 위대한 일상에 집중하는 친구들의 삶을 향한 태도는 태풍에 씻겨 맑은 다도해의 풍경을 압도하였다. 우리는 거친 봄바람도 멎어 고요한 섬 산의 정상에 잠시 눌러앉아 놀았다.
산달도에는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 거제도와 연결하는 다리가 놓였다. 그 후 경기가 좋지 않아 영업하지 않는 식당이 많다. 공사를 하다가 중단한 건물이 뼈다귀만 남았고, 휴게소나 편의점도 없었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길가 의자에 앉아 궁합이 잘 맞는 인절미와 맥주로 요기했다. 식당에서 먹을 계획으로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마땅한 식당이 없어서 배낭에 있는 비상식량을 다 꺼내 먹었다. 양식장이 바라보이는 바닷가에 넓게 뚫린 길에는 차들만 먼지를 내며 달렸다. 발랄하게 푸른 바다는 섬의 스산함은 개의치 않는 것처럼 조용조용 해안으로 밀려왔다. 섬의 4월은 따뜻하고 다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o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죽은 대지에서 라일락이 새끼를 치고,
추억은 욕망과 뒤섞이고,
봄비는 무디어진 뿌리를 흔들어 대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