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산 청산도(2022년 4월)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이 겨울이 길었다. 생명의 기미도 보이지 않던 딱딱하고 차가운 땅에는 꽃이 피고 새순이 텄다. 우리는 남도의 한 섬이 펼치는 봄의 신비를 보고 느꼈다. 겨울은 잊었다. 이제 봄이다.
축제가 열리는 청산도에는 관광객으로 넘쳐났다. 대형 관광버스가 열대쯤 왔고, 400명이 정원인 배의 선실도 꽉꽉 찼다. 작은 섬이 가라앉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들 정도였다. 오직 한 대인 마을버스가 섬을 한 바퀴 돌고 오려면 30분이 걸린다. 한 번 놓치면 30분을 기다려야 해서 배에서 내리자마자 뛰어가서 첫차를 탔다. ‘슬로시티 청산도‘라는 팻말이 우리를 보고 웃고 있었다. 버스는 한적한 도로를 신나게 달리다가 다음 정거장 근처에서 경적을 크게 울렸다. 소심한 승객들이 우리 때문에 기사가 화가 난 것이 아니냐고 수군대었다. 그러자 젊은 기사는 집에 있는 어르신들에게 버스가 온다고 알려주려고 크게 울리는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경적을 듣고 나오는 주민은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찍었다는 곳에는 샛노란 유채꽃이 섬을 찾은 사람들을 홀리고 있었다. 배수가 잘되라고 돌을 층층이 쌓은 ’구들장논‘이 거인의 계단 같았다. 돌담이 경계 지은 논 사이의 길에는 서편제의 세 주인공이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하는 진도 아리랑 소리를 뽑으며 걸어올 것 같았다. 우리는 4개의 섬 산 중 하나인 매봉산에 가려고 범바위 입구에서 내렸다.
매봉산은 높지 않고(384.5m) 산길도 완만했다. 인적이 드문 산길에는 갖가지 봄꽃이 저마다의 색으로 단장하여 피어있었다. 자그마한 연보라색 수수꽃다리가 은은한 향을 뿜고 수줍게 피었다. 꽃들은 정원에 누군가 심은 것처럼 딱 어울리는 자리에 피었다. 모양도, 향기도 발칸 반도에서 왔다는 라일락과 비슷하지만, 우리 땅에서 오랫동안 자라고 피어난 꽃이다. 라일락처럼 향이 짙지 않아 꽃에 코를 바짝 대고 향을 흠뻑 맡았다. 보라색 향이 몸을 물들이는 기분이 들었다.
벚꽃은 땅에 떨어져 산길을 분홍색으로 물들였다. 진달래 꽃잎이 햇빛을 받아 고급 시폰 블라우스 소매처럼 팔랑였다. 바다를 끼고 이어진 낭떠러지 길에는 자란(紫蘭)이 우아하게 홀로 피었다가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의 환호에 놀랐다. 귀부인같이 자태가 고상한 자주색 난 한 포기가 탐이 나서 살짝 만져 보았다. 꽃을 보호하라고 야단치는 듯이 바다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복슬복슬한 연두색 산과 햇볕을 머금은 비취색 바다가 어울린 색의 조합을 바라보면 눈이 맑아졌다. 수북한 나무가 오솔길에 터널을 만들었고, 가지 사이사이로 삐져나오는 남도의 맑은 햇살이 길을 밝혔다.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야단난 것처럼 크게 났다. 절벽이 이어진 해안선 사이에 해변이 보였다. 어린아이 머리만 한 몽돌이 바닷가에 깔려 그 사이로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가 하며 내는 소리였다. 바로 앞에는 상도라는 섬이 웅크리고 있다. 상도라는 이름은 거북이 모양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뽕나무가 있어서라기도 했다. 친구는 강아지가 누워 있는 모양 같다고 했다. 몽돌은 얼마나 오랫동안 파도에, 바람에 시달렸는지 모가 하나도 없었다. 깊게 들어온 해안을 집어삼키듯이 세찬 파도가 몰아쳤다. 이곳은 자기장이 6배나 강해서 나침반도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성(磁性)이 강한 범바위와 상도, 여서도가 이루는 삼각형 안에서는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나침반이나 GPS가 작동하지 않는다. 평범하지 않은 기운이 맴도는 해변에는 갯완두꽃이 해처럼 붉게 피어있었다. 더 좋은 기운을 받으려면 범바위를 올라가야 한다는데, 갈 길이 멀어 우리는 지름길로 돌아서 서편제 촬영지로 갔다.
밭에는 청보리가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를 이루며 넘실거렸다. 청보리만큼 푸르게 자란 밀도 함께 흔들렸다. 아 어느 사이에 대지는 이토록 푸르러졌는가. 나는 장성한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처럼, 추위를 이기고 다시 태어난 풀과 나무와 꽃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서편제 촬영지 부근 주막에 자리를 잡고 요기하였다. 청산도 막걸리에서 먼 땅과 깊은 바다의 냄새가 났다.
항구에는 할머니들이 톳과 쑥을 팔고 있었다. 방금 건져 올린 싱싱한 톳 만 원어치 달라고 했더니 덤을 주어 봉투가 묵직했다. 집에 와서 톳을 씻고 데치느라 애를 먹었지만, 청산도의 바다와 산, 꽃을 떠올렸더니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불가사의한 자기장의 힘을 받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