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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Jul 16. 2024

과거의 영광은 빛이 바래도

세비야성당 그리고 스페인광장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그의 시신은 스페인 땅에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그가 이방인이라고,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비난했지만, 그의 관을 4명의 왕이 떠받들고 있게 만들었다. 절대로 스페인 땅에 묻히지 않겠다는 고인의 유언을 반쯤 존중하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콜럼버스는 이 기발한 ‘무덤’을 좋아할까. 스페인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든 기초를 선사한 콜럼버스의 관은 세비야 대성당의 공중에 떠서 관광객에게 둘러싸여 있다. 

     

마드리드역까지는 친구가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여행 다니면서 마시라고 친구가 준 와인을 고이 챙겨서 기차를 탔다. 검표원이 뭐라고 하는 데 문제가 있는 줄 알고 긴장하여 다시 물었더니 “Qué tal?”이라고 인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발음이 어려워 몇 번 되뇌었다. 

남쪽으로 가는 기찻길 옆으로 올리브 나무와 목장으로 덮인 구릉이 끝없이 이어졌다. 고층 아파트나 산이 없는 순수한 평원의 연녹색으로 시야가 맑아지고 머리가 시원했다. 공장이 거의 없고 농업이 주 산업인 이 나라의 청정함이 부러웠다. 마드리드에서 2시간 반 만에 스페인 남부 세비야에 도착했다.

택시 기사는 좁은 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호텔 시몬(Hotel Simon) 정문 앞에 정확히 세워주었다. 100년이 넘은 호텔은 세월만큼 위엄이 서려 있어 들어서자마자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우리 방은 1층인데 천정이 높아 공기가 시원하고 덧문을 여니 좁은 길이 내다보여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덜컹덜컹 소리가 났다. 가까운 투우장에서 투우 경기가 있는지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메뉴를 보니 스페인어로만 쓰여 있어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천천히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는데 성공이었다. 식당 벽에는 유명한 투우사에게 돌진하는 소, 투우사의 화려한 의상 같은 투우에 관한 사진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여자 투우사 사진이 있었는데 그녀가 실존 인물인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유일한 종업원은 정신없이 바빴다.

길을 걷는데 감미로운 향이 코를 찔렀다. 귤밭에 꽃이 피면 이 향기로 가득한 제주가 생각났다. 세비야의 가로수는 모두 오렌지 나무였다. 그리고 나무는 마침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달콤한 향기를 사방에 퍼뜨렸다. 화약의 재료로 쓰기 위해 오렌지 나무를 심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어서 좀 실망스러웠지만, 귤꽃 향기는 우리의 여행을 더욱 낭만적으로 만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성당중 하나인 세비야 성당의 꼭대기에는 종탑(히랄다)이 있다. 이슬람 술탄이 34층 높이인 이 종탑으로 말을 타고 올라가려고 계단이 아니라 경사로로 만들었다. 쪽문으로 도시 전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세비야에서 가장 높은 곳에 도착한다. 화려한 이슬람 돔을 걷어내고 십자가를 올리며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의 승리를 환호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독실한 신앙심으로 전쟁에서 이겼다고 자신만만했다. 그들만의 하느님은 콜럼버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신대륙을 ‘발견’하도록 한 것일까. 수백 년을 살다가 쫓겨난 이슬람 사람들과 ‘발견 당한’ 대서양의 섬사람들은 하느님이 보호하지 않으셨던 것일까. 

신대륙의 황금을 실은 배는 대서양을 항해하여 과달키비르강으로 올라와 세비야의 항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이자벨 1세의 후원을 받아서 세비야에서 배를 출항했고 어렵사리 얻은 황금으로 세비야 사람들은 성당의 황금 제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비야는 성당의 제대처럼 화려한 황금시대를 누렸다. 히랄다에서 바라보는 오래된 도시는 과거의 영광을 은은하게 품고 붉은 태양 아래에서 빛났다.   

   

스페인 광장은 세비야의 바로 그 영광을 재현하고자 1929년에 세운 박람회장(이베로-아메리카 박람회)이다. 반원형 구조의 회랑 앞에는 작은 수로가 흐른다. 원 없이 설계하고 아낌없이 재료를 쓴 건축가 아니발 곤잘레스가 부럽다고 건축가 친구가 말했다. 건축은 다른 예술과 달리 건축가의 뜻대로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로 다리의 난간은 색색 가지의 도자기이고 바닥은 예쁜 모자이크 타일이다. 어느 한 귀퉁이도 허투루 만들지 않아 건물이 거대한 조각품이다. 후두둑 비가 쏟아져 2층으로 올라가 비를 피했다. 곧 비가 그치고 다시 나타난 해가 스러지는데 어디선가 환호하는 군중의 소리가 들렸다. 플라멩코 거리공연이었다. 손바닥으로 박자를 맞추고, 흐느적대는 기타 연주와 하소연 같은 노랫소리에 맞추어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춤을 추었다. 딱딱 소리를 내려고 네모난 판자 위에서 스텝을 밟는 무희의 아름답고 무표정한 얼굴에서 집시여인의 비애가 물씬 흘러서 나는 괜스레 아련하고 울적해졌다. 우리는 ‘잘 만든’ 건축물에서 벌어지는 이국적인 음악과 댄스가 행운 같아서 아낌없이 1유로 몇 개를 투척했다. 스페인 광장을 나오다가 돌아보니 완벽한 건물이 지는 해를 두 팔로 안아 황금빛으로 빛났다. 

스페인의 저녁 식사 예약은 가장 이른 시간이 8시이다. 우리는 모처럼 괜찮은 식당을 예약했다. 황금을 모아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황금의 탑 건너편에 즐비한 식당 중 하나였다. 한강 고수 부지처럼 사람들이 산책을 나와 거닐었고 우리도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과달키비르 강둑길을 걸었다. 황금을 실은 배가 오갔던 시대만큼 수량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세비야의 강은 플라멩코 무희의 검은 옷자락처럼 넘실대며 흘렀다.

https://www.youtube.com/watch?v=PGd-2R0Ykko&ab_channel=Ram%C3%B3nKailani%2COldCha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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