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聖)과 속(俗)의 경계에서

61산 선운산(2022년 9월)

선운산은 불교의 성지이다. 아주 오랜 시절부터 절을 짓고, 바위 단면에 거대한 부처님을 조각해 모셨다. 이곳에서 구도자들은 마음을 닦고, 수많은 사람이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선운사를 감싸고 있는 나지막한(336m) 선운산은 높은 곳만 바라보며 높은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낮아지라고 설법하는 노스님 같다. 정상에 올라 보면 대둔산, 내장산 같은 주위의 내로라하는 산 사이에서도 당당하다. 이파리가 살랑거리는 활엽수가 늘어선 능선에서는 늦은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이 불고, 오래 산 나무들이 바위의 틈을 비집고 자라나서 청년처럼 싱싱하다.


가늘고 섬세한 꽃잎이 가지런히 피어난 꽃무릇이 주홍색 밭을 이룬 선운사 입구를 지나 선운산에 올랐다. 천마봉까지 길은 평이했으나 태풍에 갇힌 기후가 습하고 더워 힘들었다. 이번 여름은 왜 이리 떠나기를 주저하는가. 우리는 잘생긴 산을 보면서 한여름 같은 꿉꿉한 더위를 견뎠다. 천마봉에서는 수풀 사이로 마애여래좌상을 보았다. 바위에 새겨져 긴 시간을 살아온 부처님의 얼굴은 자비롭기도 하고 엄격하기도 했다. 조금 내려와 올려다보면 천마봉의 바위는 무시무시하다. 온화한 마애불 부처님으로 험상궂은 바위는 유연해지고, 한없이 자유로워진 산은 성스러운 부처님의 세상이 되었다.


도솔암에서 선운사에 이르는 도솔천 옆길은 ‘미륵불이 사는 도솔천의 내원궁’으로 가는 길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꽃무릇의 색이 물 위에 어른거려 붉은 잉어가 헤엄치는 것처럼 보였고, 물에 떨어진 상수리나무 열매의 타닌 성분으로 먹색이 된 물이 출렁였다. 십선도(불교인이 몸, 입, 마음과 관련하여 닦아야 할 선한 10가지 행동기준)를 지켜야 착한 사람이 되고 미륵불이 사시는 도솔천에 갈 수 있다는데, 그 도를 지킬 엄두가 나지 않는 나는 도솔천의 분위기만으로 분에 넘치게 고마웠다. 선운사는 도솔천이 거의 끝나는 곳에 넉넉하게 자리 잡아 그 오랜 시간 동안 간직한 이야기를 비밀스럽게 품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가지가 갈라져 높이 자란 600년 된 나무 장사목,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등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세월을 보낸 자연의 유물로 절은 더욱 신비로웠다.


시인들은 이곳에서 성(聖)보다는 속(俗)을 보았다. 김용택, 김영남, 최영미 같은 시인들은 선운사와 도솔천에서 세속의 사랑과 이별, 삶의 환희와 슬픔을 느꼈다. 김영남은 시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에서 “만약 어느 여자에게 이처럼/아름다운 숲속 길이 있다면/난 그녀와 살림을, 다시 차리겠네.”라고 하고, 김용택은 <선운사 동백꽃>에서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라고 썼다. 최영미는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이라고 선운사 뒤뜰에서 피고 지는 동백꽃을 보며 <선운사에서>를 읊었다.


선운산을 오르고 내리는 길에 핀 꽃무릇의 무리는 평범한 등산객의 마음도 어지럽게 했다. 봄에는 또 피처럼 붉은 동백이 절을 물들인다니 도를 닦고 선을 구하라는 성인의 말씀을 이곳에서 지킬 수 있을까. 착한 사람이 되거나, 성인이 되기를 아예 포기해 버린 시인은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바에야 비루한 본성에 매달려 사소한 감정을 쏟아냈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는 꽃무릇의 꽃과 줄기처럼 분명하지 않다. 순수한 사랑은 성스럽고, 성인의 삶은 속인의 일상처럼 평범하고 슬프다. 미륵불의 소망처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착해져서 설법을 3일 만에 깨닫는 기적이나, 돌아가시고 묻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적이 다시 일어나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미워하며, 소소한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살아갈 것이다.


곤하게 잠들었다가 창으로 쏟아지는 빛을 느껴 갑자기 잠에서 깼다. 서쪽 하늘에 태양이 진실한 하루를 보내고 남은 아쉬움을 짙은 꽃무릇 색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도솔암 가는 길-김영남


만약 어느 여자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숲속 길이 있다면

난 그녀와 살림을, 다시 차리겠네.

개울이 오묘한 그녀에게

소리가 나는 자갈길을 깔아주고

군데군데 돌무덤을 예쁘게 쌓겠네.

아침이면 노란 새소리로 풀꽃들을 깨우고

낮에는 이깔나무 잎으로 하늘을 경작하다가

천마봉 노을로 저녁밥을 짓겠네.

가을이 되면 물론 나는

삽살개 한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며

쓸쓸한 상상을 나뭇가지 끝까지 뜨겁게 펼치겠지만

모두 떠나버린 겨울에는 그녀를 더 쓸쓸하게 하겠지?

그러나 난 그녀를 끝까지 지키는 장사송(長沙松)으로 눈을 얹고

진흥굴 앞에서 한겨울을 품위 있게 나겠네.

설혹 그녀에게 가파른 절벽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나는 그 위에 저렇게 귀여운 암자를

옥동자처럼 낳고 살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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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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