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의 세계에서 우리는

62산 화왕산(2022년 10월)

2007년 12월, 경남 창녕 송현동 15호분에서 주 피장자 옆에 누워있는 금귀고리를 한 17세 소녀의 유골을 발견했다. 다른 무덤의 순장자와 달리 그녀는 외상도, 저항한 흔적도 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자세로 누워있었다. 모시던 님의 저세상 길을 기꺼이 따라갔던 것일까?

소녀의 고향은 오래전 멸망해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가야의 소국 비화가야다. 반듯한 직사각형 논밭이 노랗게 익어가는 비옥한 땅인 창녕에는 1500년 전 1만 명 정도의 사람이 모여 살았던 고대 국가의 자취가 남아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호시탐탐 노리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 화왕산 정상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북으로 올라가는 왜구를 막으려고 곽재구 장군이 이용하기도 했던 화왕산성. 지금은 산성 안 억새밭이 가야 시대부터 이어온 아득하고 오랜 시간의 흐름처럼 펼쳐있다.

그 높은 곳(756.6m)까지 오르는 길은 그때나 지금이나 쉽지는 않다. 우리는 직접 오르는 길이 아니라 관룡산을 오르는 조금 먼 길을 택했다. 원효가 용 아홉 마리를 보고 지었다는 오래된 절 관룡사를 지나면 나오는 용선대에 석조 여래좌상이 동쪽을 향하여 세상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양식이라니 돌에도 생명이 깃들지 모르는 긴 세월이 아닌가. 그동안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온 돌부처님의 얼굴은 무덤덤해 오히려 영원해 보였다. 우리는 그 근처에서 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었다. 키가 크지 못한 소나무 그늘이 드리워 부처님 손안처럼 분위기가 아늑했다.


화왕산까지는 평탄한 산길이 이어졌다. 정상에 이를 때쯤 느닷없이 산성과 억새밭이 나타났다. 6만 평의 분화구를 둘러싼 산성과 그 안에 물결치는 억새밭은 무한대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무한은 아주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 작게는 픽셀로 끝없이 나뉘고 크게는 지구에서 가장 빠른 빛 알(光子)이 아무리 여행해도 도달할 수 없는 우주같이 크다. 아직 만개하지 않은 억새는 촘촘히 자라 넓게 퍼져 신비로운 무한의 세계를 이루었다. 억새밭의 중앙에는 물을 모아놓은 정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가야인이나 조선시대 사람들이 외적과 싸우며 버틸 수 있게 해주던 생명의 물이었다. 나는 오래전에는 생과 사가 오가는 전쟁터였던 억새밭에서 유유히 노닐면서 유구한 세월의 힘을 가슴 벅차게 느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함께 이리저리 흔들리는 은빛 억새는 세상이 변하고 시간이 속절없이 흐른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우리 마음을 달래주었다.

아직도 태양의 열기는 따가워 산에서 파는 차가운 맥주를 거부할 수 없었다. 차갑고 톡 쏘는 반 잔의 맥주가 창녕 시의 전경만큼 시원했다. 산과 산 사이의 논밭이 기름지고 풍요로워 보였다. 낮은 집들이 모여 있는 소도시인 창녕은 가야 시대에는 교통과 전략적 요충지였다. 아직도 위세가 등등한 거대한 왕릉, 그곳에서 발견된 금붙이와 순장 풍습으로 보아 강력한 왕권 국가였을 것이다.


산에 오르고, 오래된 절을 지나가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부처님 옆에서 밥을 먹었다. 억새밭을 거닐고, 1,500년 전의 왕릉을 보면서 무한과 유한을 함께 사는 우리의 삶을 생각했다. 영원한 시간의 선 위에 한 점으로 남은 금귀고리를 한 가야 소녀와 번성했던 고대 국가, 그리고 우리. 산과 들, 강만이 영원하여 밥풀때기 같은 삶을 무한하게 품어줄 것이다.



나 없는 세상

이성선

나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저 물속에는

산 그림자 여전히 혼자 뜰 것이다.


화왕산2.jpg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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