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71산 곰배령(2023년 5월)

화가 원계홍(1923-1980)은 55세(1978년)에 첫 개인전을 열고, 2년 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잊혔지만, 그의 작품은 최근 다시 호평받고 있다. 그림 속 근대화 이전 서울의 골목길은 인상파 화가가 그린 유럽의 어느 동네같이 고풍스럽다. 구도와 색감이 형태의 본질을 흐리지 않아 가난이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예술은 짧게 피었다가 지고 나서도 우아한 꽃처럼 남아 요즘 성곡 미술관에서 성황리에 전시 중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은 없다고 했다. 곰배령의 깊은 숲속에서 철쭉은 주근깨가 난 연분홍 꽃잎을 얌전하게 떨어뜨리고 있었다. 나무 밑에 우수수 흩어진 꽃잎이 하도 고와서 지고 마는 꽃의 운명이 더욱 아쉬웠다. 심심 산골을 물들였던 철쭉의 화려한 시절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지만, 곰배령은 여전히 아름답다. 1,200m 고지의 평원에는 철쭉이 아니라도 풀과 나무 사이에서 바람을 맞고 흔들리는 이름 모를 야생화가 지천이기 때문이다.

봄이 지나가고 있는 산에 핀 화려하거나 소박한 꽃으로 눈이 현란하고 마음이 설렜다. 나는 깊은 숲에 유배하고 있는 고귀한 신분의 왕자나 공주 같은 꽃잎을 슬쩍 쓰다듬기도 하고, 옅은 향을 큰 숨을 쉬어 맡았다. 손을 타지 않은 순수한 생명체의 기운이 거짓말처럼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금방 지고 마는 꽃이라고 생명이 부질없다고 할 수 없다. 불꽃처럼 타오르다 스러진 어느 화가의 삶처럼 말이다.

구불구불 산골길을 돌아 맑은 계곡을 끼고 한참을 가서 또 깊은 산으로 가면 곰배령 입구다. 시야를 가리는 고층 아파트나 광고판 없이 녹음이 짙은 산이 이어져 눈이 초록으로 물든다. 나무와 경쟁하듯이 푸른 계곡의 물은 뭐가 그리 급한지 빠르게 흘렀다. 하루에 450명 예약을 받아 들여보내는 산행이라 더 귀했다. 봄에 ‘천상의 화원’ 곰배령에 가는, 백운대에 이은 또 다른 숙원을 이루는 날이었다.

설악산 남쪽 점봉산(1,424m)은 한반도 전체 식물 종의 5분의 1에 달하는 854종이 자생할 정도로 생물다양성이 높아 설악산국립공원(1970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1982년),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1987년)에다 백두대간보호지역(2005년)으로 지정되었다. 점봉산은 출입이 금지되고, 남쪽 구간에 점봉산 곰배령 산림 생태 탐험로를 개방했다. 한 바퀴 도는데 4~5시간 정도 걸리는데 아주 완만한 A코스 (중급)와 조금 경사가 있는 B코스 (중상급)로 친절하게 나누어져 있어 각자 역량에 따라 걸으면 된다.

들어갈 수 없어 신성하게 보이는 점봉산 아래 곰배령 평원에는 바람이 사방에서 불었다. 늦은 봄이라 차갑지 않고, 높은 지대라 순수하게 맑은 바람이 불어 재꼈다.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흩어진 모양으로 오랜만에 여럿이 함께 온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이 봄바람으로 일그러질 리 없다. 바람은 지고 피는 꽃을 흔들다가 우리의 땀도 식혀주었다.

비교적 길고 경사가 있는 B코스에는 주목 군락지와 철쭉 군락지가 보였다. 천천히 자라고 오래 사는 주목은 다양한 수형을 이루면서 숲을 지키고 있다. 틈새에 핀 작은 꽃이 사람의 눈길에 수줍게 고개를 돌렸다. 긴 잎사귀를 민망하게 쩍쩍 벌린 관중은 숲을 빈틈없이 채웠다. 양지꽃, 피나물, 홀아비바람꽃, 세잎양지꽃, 산괴불산주머니꽃, 미나리아재비, 풀솜대, 산마늘, 미나리냉이… 친구들이 알려주기도 하고 나중에 검색해 찾아본 꽃 이름이 꽃의 얼굴과 재미있게 어울렸다.

얼마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여행과 모임의 자유에 들뜬 사람들은 평상에 오글오글 모여앉아 점심을 먹었다. 언제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까 막막해하면서 지낸 긴 팬대믹의 시간을 우리는 잘 보내고 살아남았다. 붙어 앉아 나누어 먹는 도시락은 더 맛있었다. 거의 다 내려와 두 코스가 만나는 곳에는 시냇물이 햇볕을 받아 황홀하게 빛났다. 자갈은 보석처럼 빛이 나고 은빛 시냇물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흘렀다.


곰이 발라당 누워있는 모양의 곰배령에, 짧게 살아 더 귀한 꽃이 피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그곳에 한 번쯤은 가보길. 그곳에서 부는 야생의 바람이 전하는 신성한 기운을 온전히 느껴 보기를. 인생이나 꽃이나 만물이 영원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아 안타깝지만, 천상의 화원 곰배령에서 순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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