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격은 미약하나

72산 천태산 (2023년 6월)

충북 영동의 천태산에는 오래된 산사를 지키는 1,300살의 은행나무가 있다. 나무와 산과 절은 오랜 시간 함께 해서 너와 나 구분 없이 하나로 보인다. 희끗희끗한 암벽이 숱이 무성한 신록 사이에 난 새치처럼 보였다. 그 산 아래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고찰(古刹) 영국사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알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99개 명산을 오른 친구의 100번째 산행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시집가는 날 등창 난다”라는 말이 있다. 성격이 꼼꼼한 친구는 자신의 100 명산행을 위해 오래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했는데 전날 밤 장염에 걸려 완쾌하지 않은 채 길을 나서야만 했다. 아침에 먹을 김밥과 간식을 준비하고 버스 예약금까지 냈으니 가지 않을 수 없었지만, 밤새 앓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걷는 모습이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늘 에너지가 충만했던 평소와 달리 기운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친구를 걱정하면서도 우리는 나무와 풀이 우거진 숲, 주름이 자글자글한 삼신할미 바위,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삼단 폭포를 보며 볼거리도 많은 산을 온전히 즐겼다.

암벽타기가 취미인 친구가 이 산은 암벽 구간이 있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긴 암벽일 줄은 몰랐지만. 첫 번째 암벽은 10m, 두 번째는 25m, 마지막 슬랩(경사가 30~70도인 반반한 바위 사면)은 75m였다. 허연 바위가 바로 앞에 떡하니 나타났을 때 두려웠지만,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앞서서 거미가 기어가듯 술술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나는 주저하는 다른 친구들에 앞서 용기를 내어 줄을 잡고 발을 디뎠다. 팔보다는 발과 다리에 힘을 주고 발끝으로 바위를 디디라고 가르쳐 주는 소리가 들렸다.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침착하게 발을 딛고 줄을 잡으며 올라갔다. 첫번째 암벽을 올라서니 까마득하게 내리꽂힌 절벽이 보였다. 초보자인 내가 올라가니까 다른 친구들도 용기를 내어 하나씩 올랐다. 우회로가 있었지만 다들 도전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긴 슬랩을 오를 때는 중간의 바위 사이에서 잠깐 쉬면서 절을 품고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첩첩이 포개 이어진 서대산, 성주산, 덕유산, 속리산, 계룡산 같은 높은 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한가운데에서 짙은 녹음이 가득한 산의 물결을 바라보다가 시인처럼 “그때는 없던 내 정신이 풀빛을 띠고 나뭇잎 반짝어림을 띠었다”*

*산에 가면 – 박재삼

천태산은 고귀한 정상(715m)을 함부로 내어주지 않지만, 도전 정신과 용기를 가진 사람에게는 활짝 내어주었다. 우리는 좀 늦게 올라 사람들이 다 내려가 한적한 정상석 앞에서 요란하게 친구의 100산을 축하했다. “부처의 지혜로 하늘과 같이 영원히 편안함을 누리라”라는 뜻을 품은 천태산은 고통을 참으며 올라선 사람도, 두려움을 이기고 바위를 탄 사람도 자애롭게 맞이했다. 우리는 모두 힘든 길을 피하지 않고 곧고 험난한 길로 올라왔다는 자부심으로 기개가 암벽처럼 높이 차올랐다. 산행을 시작할 때는 축 처져있었던 친구도 100번째 산에 올라서자, 예전같이 기운을 되찾았다.

올라온 A코스처럼 하산길인 C코스도 암벽이 이어졌다. 이제는 자신이 생겨서 올라올 때 배운 대로 차분하게 줄을 잡고 내려왔다. 우리는 모두 서로 도와주고, 물을 나누어 먹으며 조심스럽게 하산을 마무리했다. 통일 신라 시대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영국사는 험한 산속에 있어서 그런지 적막했다. 절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한 은행나무가 무언가 해냈다고 의기양양한 우리를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가지에 다닥다닥 잎을 내며 아직도 왕성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는 천 살 노인 나무에 비하면 우리는 고작 몇십 년 사는 미물에 불과하지만, 영원 같은 하루를 살아내지 않았는가. 우리는 당당하게 나무 앞을 지나갔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바위에 바둥거리며 올라오는 나를 은행나무와 절이 절벽 아래에서 응원하고 지켜주고 있었다.


하산해서는 시골 맛 반찬과 깊은 산의 향기가 나는 구수한 능이 전골을 먹었다. 용빈 식당 화단에 들꽃처럼 자연스럽게 꽃이 피어있었다. 우리는 모험이 가득했던 산행을 무사히 마쳤음을 자축하고, 산행을 도와준 성(聖)과 속(俗)의 모든 존재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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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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