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산 검봉산 문배마을 (2023년 6월)
2019년,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은하 M87 블랙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죽은 별의 잔해인 블랙홀 경계의 붉게 타오르는 ‘사건의 지평선’에서는 빛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검은 구멍같이 보이는 별 안에서도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를 것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8대의 망원경으로 찍은 사진으로 실체를 확인했지만, 거대한 질량 덩어리인 블랙홀의 내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어 그 신비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아담한 산 아래 몇 채 되지 않는 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강촌역에서 내려 한적한 도로를 따라 조금 걸어가 올라가면 강선사다. 그곳에서부터 제법 경사가 가파른 바윗길을 애쓰고 올라가면 강선암(485m)이다. 강선암을 오르기 바로 전, 산과 산 사이로 시원하게 뻗은 북한강 줄기를 보았다. 힘들게 올라가 숨을 고르며 바라보는 물과 산이 어우러진 풍경은 뇌리에 선명하게 남는다. 섬이 배처럼 둥둥 떠 있는 다도해가 펼쳐지는 풍경이 있는 산이나 허리가 꺾인 동강을 내려다보는 산. 그동안 다닌 산에서 보고 새겼던 그림이 하나씩 떠올랐다.
지난주에 암벽을 등반해서 자신이 있었지만, 인적이 드문 산길이 만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선암을 지나자, 검봉산 정상으로 가는 능선길이 평탄하게 쭉쭉 이어져 산행이 감미로운 산책 같았다. 평지를 걸으면 이야기가 많아진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도 삶에 대한 설렘을 잃지 말자고 이야기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를 보낼 기대에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도란도란 수다를 떨면서 가다 보니 숲의 향기가 깊다. 더벅머리 소년처럼 허연 꽃을 드리운 밤나무가 비릿한 향을 발산해 산 공기를 야릇하게 감쌌다. 하늘을 찌를 듯이 다투어 키가 큰 전나무가 상쾌한 솔향을 내뿜고, 활엽수의 가지마다 가득한 넓적한 푸른 잎의 내음이 코를 찔렀다. 그리 높지 않은(530m) 검봉산 정상에서는 산 밑 세상의 소음이 걸러져 듣기 좋았다.
우리는 문배마을을 향하여 하산을 시작했다. 가파른 돌길을 조금 내려오니 부드러운 흙길이라 발걸음이 가볍다. 내려오면서 숲은 더 깊어졌다. 자동차로 오는 친구들이 문배마을로 직접 가서 기다리고 있어서 우리는 속도를 내서 걸었다. 다 내려온 것 같지 않았는데 갑자기 숲속의 빈터에 신기루처럼 마을이 나타났다. 작은 배처럼 생겨서인지, 혹은 문배나무가 많았기 때문인지 문배마을이라고 불리는 산골 마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6.25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한쪽은 50m 폭포가 담장처럼 마을을 수호하는 산속의 분지이기 때문이다. 블랙홀 주변의 ‘사건의 지평선’ 같은 산과 폭포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우리는 검봉산(530m)을 넘어서 갔고, 다른 쪽으로는 봉화산(526m)을 넘어야 이 마을에 들어갈 수 있다. 또 다른 길은 50m나 되는 구곡폭포이니 문배마을은 웬만해서는 밖에서 들어가기 어려웠다. 요즘에는 장씨네, 이씨네, 신씨네 같은 식당이 간판을 크게 걸고 장사를 한다. 관광지로 개발된 구곡폭포 쪽에서 온 사람들이 꽤 많아서 마을은 축제처럼 붐볐다. 우리는 ‘장씨네’에서 다른 친구들을 만나 토종닭 누룽지 백숙을 먹었다.
폭포로 떨어지는 물이 모여있는 생태연못에는 분수가 솟아오르고, 둘레길이 있다. 밭에는 갖가지 작물이 여무느라 초여름의 태양 에너지를 열심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아무도 찾지 않고, 나가지도 않던 동네였지만, 이제는 관광지가 되어 땅값이 올랐다고 누군가 이야기했다.
온종일 산과 능선을 쏘다니느라 힘들어 구곡폭포를 가까이 보는 전망대에 오르기를 망설이는데 춘천에 사는 친구가 10m만 가면 된다고 했다. 생태연못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살에 반들반들해진 바위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겨울에는 하얗게 얼어붙어서 빙벽을 오르는 암벽등반가들이 온다고 했다. 웅장한 폭포를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서 힘들어도 올라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폭포에서 마을로 가는 편한 길이 나서 세상과 연결되었으니, 문배마을은 더 이상 블랙홀이 아니다. 웜홀 같은 꽤 가파른 경사로로 내려오면서 세속과는 동떨어져 살았던 문배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블랙홀 같은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는지 모른다. 블랙홀 안에서도 물리학적 법칙이나 수식으로 가늠할 수 없는 어떤 달콤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5,500만 광년을 가야 도달할 수 있는 검은 별에 대한 정보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