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포짤로에서 (2026년 1월 7일)

원래 우리 일정에 말타(Malta)는 들어있지 않았다. 시칠리아까지 가면서 말타에 가지 않으면 아깝다는 주위의 권유에 혹해 급하게 페리를 예약하고 숙소를 잡았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계획이라고 하지만, 위치를 확인하려 전날 포짤로 항구에 갔더니 우리 페리는 강풍으로 취소되었다고 했다. 환급되지 않고 변경만 가능해서 우리는 짧은 회의 끝에 하루만 다녀오자고 했다. 두 밤을 자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자는 원래 계획은 그렇게 반나절의 짧은 여행이 되었다.


아그리젠토 숙소(Le Terrazze di Pirandello)의 아침 식사는 풍성했다. 호주에서 온 그림같이 예쁜 아이들의 아빠가 같이 아침 식사하며 우리와 여행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에트나산에 운전해서 올라갈 자신이 없었는데 그는 운전해서 갈 거라고 했다. 외국 유학을 오래 했던 친구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과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그녀의 붙임성에 감탄하며 그들의 수다를 들었다.

아그리젠토 근처 레알몬테 해변에는 ‘터키인의 계단’(Scala dei Turchi)이 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하얀 파도가 미친 듯이 널뛰고, 온통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우리는 새하얀 석회석이 층계처럼 이루어져 있다는 해안 절벽을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늘 푸르고 명랑하기만 했던 지중해는 회색빛으로 칙칙하고 무서웠다.

아그리젠토를 떠나 젤라(Gela)에서 잠깐 쉬었다가 포짤로(Pozzallo)까지 가는 길에서 나는 제주도를 생각했다. 두 섬은 크기만 다른 비슷한 화산섬이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진 푸른 평원, 굴러다니는 돌로 쌓은 쫀쫀한 돌담, 풍력 발전소, 그리고 달고 풍성한 농수산물. 제주의 한 쉐프는 이탈리아 요리학교 알마(ALMA)를 나와 시칠리아 모디카에서 실습하고, 제주에 식당 모디카를 열었다. 시칠리아와 제주에서 나오는 식재료가 비슷해서라고 했다. 그 식당에서 시칠리아식 요리를 먹으면서도 나에게 그곳은 멀고 낯선 이름이었다. 포짤로에 거의 다 와서 모디카로 가는 표지판을 보고 나는 또 제주도를 떠올렸다.

해와 비가 변덕스럽게 나타났다가 무지개는 떴지만, 바람이 거셌다. 다음 날 몰타로 가는 페리가 취소되는 바람에 포짤로 항구에서 멀지 않은 숙소(Hotel Continental)에서 하룻밤을 더 지내기로 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우리 짐을 2층까지 들어준 머리가 하얀 호텔 주인장의 접대가 따뜻했고, 주차장이 넓었기 때문이다. 사장님과 직접 거래를 하니 가격도 할인해 주었다. 비수기 호텔에는 손님보다 일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장님은 여름 성수기를 대비해 이곳저곳 낡은 곳을 고치느라 바빴다. 햇볕이 좋은 날이면 물이 찰랑이고 수영복 입은 사람들이 망중한을 즐길 야외 수영장에는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저녁은 포짤로 해변에서 먹었다. 잔잔한 다이아몬드 같은 별이 박힌 밤하늘이 쏟아져 내렸다. 투명 천막으로 가린 발코니에 앉아 오늘의 한 끼로 그날 잡은 생선으로 만든 시칠리아식 파스타를 먹었다. 테이블 밑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우리가 얼마 되지 않은 손님 중 마지막 손님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친구가 가방을 놓고 왔다고 했다. 식당에 전화하니 아직 문을 닫지 않았고, 잘 보관해 두었다고 했다. 가방을 찾기까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머리끝이 쭈뼛 서게 긴장했다. 쓸쓸하고 낯선 겨울 바닷가에서 친구는 잠시 정신을 놓았나 보다. 정신을 놓을 만하지 않은가. 별이 쏟아지는 흑단 같은 밤하늘에, 불어 재끼는 바닷바람, 싱싱한 생선요리와 도수 높은 시칠리아 맥주, 그리고 지중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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