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심이란

81산 우이령길 (2023년 12월)

날이 갑자기 추워지고 눈이 왔다. 금방 내린 눈이 쌓인 산이 보고 싶어 길을 나섰다. 추워서 갈까 말까, 하면서도 눈산을 기대하고 든든히 차려입고 나온 친구들을 우이역에서 만났다. 우이령(소귀고개)길은 산이라 하기에는 경사가 거의 없는 오르막길이다. 예약제라 한적하고, 산길은 차가 다닐 만큼 널찍하다. 도봉산과 북한산을 가르는 경계이자 우이동에서 양주로 가는 지름길인 오솔길을 한국 전쟁 때 미군이 작전을 위해 넓혔다.

1·21사태(1968년)에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 공비 31명이 침투한 루트이기도 하다. 청와대 바로 앞에서 거의 모두 소탕하여 위기를 넘긴 후 바짝 긴장한 정부는 교련 시간, 예비군 같은 비상군 체제를 만들었다. 인왕산을 넘어 부암동으로 가는 산길에는 그 당시의 총격전으로 총구멍이 선명한 소나무가 있다.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나무는 그때 그 시가전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생생하게 말해준다.

체감온도가 영하 10도가 넘는다고 했지만, 우이령길에 들어서니 바람 없이 쨍하게 차가운 공기만 맴돌아 정신이 바짝 나고 오히려 훈훈했다. 추위를 막아주는 길목이라 간첩이 택하지 않았겠냐고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우이령 정상으로 갈수록 나뭇가지 사이로 오봉이 선명하게 보였다. 새벽에 내린 눈이 쌓여 하얗게 꽃이 핀 소나무 숲이 새파랗게 얼어붙은 오봉을 떠받치고 있었다. 구름이 태양과 힘을 겨루면서 자아내는 신성한 기운이 하늘에 퍼져 엘그레코나 공성훈의 그림처럼 보였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으면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를 잊고 한참을 서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눈이 온다고, 춥다고 나서지 않았으면 겨울 산이 보여주는 숭고한 풍경을 놓쳤을 것이다. 변화무쌍한 하늘과 눈이 쌓인 산을 헐벗은 나무 사이로 보면서 완만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장엄한 그림이었다.

오봉산의 다섯 개의 봉우리 중 네 번째인 관음봉 중턱에 있는 ‘석굴암’은 굴곡진 시대의 수난을 겪고 사라질 뻔했다. 암자로 가는 가파른 아스팔트 길이 얼어붙어 차가 위태위태하게 올라갔다. 우리는 발바닥에 힘을 주고 걸어 올라가다가 염화칼슘을 뿌리며 내려오는 스님을 만난 덕분에 석굴암까지 넘어지지 않고 갈 수 있었다. 홀로 깨달음을 얻은 나반존자를 모신 동굴 산사는 영험한 기도처라 했다. 석굴암 마당 앞에는 ‘상장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있었다. 푸릇한 상록수가 바위를 감싼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들만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우이령길에는 41년 동안 일반인이 발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주위에는 아직도 군부대가 삼엄하게 지키고 있지만, 이제 예약만 하면(하루 1,190명) 언제든 걸을 수 있다. 애국심이나 이념이 생명보다 가치 있다고 믿었던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이곳은 전쟁과 죽음이 다반사였다. 공비를 소탕하다 총을 맞은 경찰이나 지령을 받고 남파된 무장 공비처럼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불나방처럼 던지는 사람은 이제 유물이 되었다. 나라를 사랑하고 신념을 가지고 산다고 말하면 비웃음을 받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생과 사의 경계가 되었던 길을 ‘자유롭게’ 걷는다.


‘애국자’에 대하여 신형철은 ≪인생의 역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 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이런 것도 애국이라면, 애국자가 될 용의가 있다.


나라를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수많은 ‘애국자’를 지켜보았던 다섯 개의 허연 봉우리가 서슬 푸른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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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길 3공성훈_2.jpg 공성훈 《바닷가의 남자》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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