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와 아랑

82산 검단산 (2024년 2월)

꽁꽁 언 검단산(657m)에 다녀왔다.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만만한 근교의 산이라 생각했는데 초기 백제의 진산(鎭山)이었다. 백제 한성 시대의 마지막 왕인 개로왕이 통치할 때 살던 도미와 아랑이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기도하려고 검단산에 올랐다고 상상했다. 예나 지금이나 산에 오르는 사람의 마음은 모두 비슷할 것이다. 삼국사기 ‘도미설화’와 최인호의 ≪몽유도원도≫를 참조했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은 위례성을 수도로 정하고 검단산을 진산으로 삼았다. 그 이후 400여 년 동안 검단산은 한성 백제를 지켜왔다. 왕들은 검단산의 너른 정상에서 정성 들여 제사를 지냈다. 그들은 이 산과 함께 나라도 영원하리라 믿었다. 제단에서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강이 보였고,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높은 산 사이로 구름과 바람이 자유롭게 흘렀다. 가끔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지만, 백성은 편안했고 왕은 어질었다. 그러나 요즘 도미는 나라를 지탱하는 산과 강의 기운이 다해간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개로왕 여경이 내기 바둑에 몰두하고 세상에서 아름답다고 소문난 여인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수군댔다.

도미는 어릴 때부터 자주 올랐던 검단산에 오르기로 했다. 아랑과 함께 하늘에 가까운 정상에서 기도하면 불길한 예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올해 겨울에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왔다. 산 아래에서는 눈이 거의 다 녹았는데 산길은 하얗게 얼음이 얼어 미끄러웠다. 계곡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그대로 얼어버려서 길이 헷갈렸다. 가느다란 발목으로 위태롭게 걷는 아랑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조금 올라가니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 우리의 땅은 얼마나 비옥하고 아름다운가.

도미는 마족의 우두머리 읍차(삼한시대 小國 지배자의 칭호)다. 그는 욕심 없이 부인 아랑과, 인정 많은 이웃과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다. 두 개의 강줄기는 하나로 합쳐 더 큰 물이 되어 바다로 흘렀고 아랑의 가슴 같은 봉긋한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아스라하게 사라졌다. 찬 바람이 불어와 아랑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도미는 따뜻한 손으로 아내의 볼을 덥혀주었다.

춥지만 정상으로 가야 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던 곳에 반드시 가야 했다. 며칠 전 여경이 사냥하다가 다쳤다고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그는 양(陽)의 기운을 받아야 산다고 아내의 새끼손가락을 잘라 피를 쏟게 하고 며칠 동안 아랑에게 간호하라 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추잡한 왕의 눈길이 싫었지만, 지엄한 분부를 거역할 수 없었다. 도미는 산에 올라 왕과는 비교할 수 없이 성스럽고 위대한 하늘에게 기도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세차게 부는 정상의 겨울바람이 살이 에이도록 파고들었다.

아랑은 태연한 척했지만, 불길한 징조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왕의 질척한 시선을 피하고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왕이 떠난 후, 사람들은 도미 부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말했다. 왕이 아무리 치근덕대도 아랑은 호락호락하지 않겠지만, 그들은 불행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느낌을 어찌할 수 없었다.

도미는 아랑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다. 맑은 눈은 총기로 반짝였고, 자태는 단정하고 고왔다. 도미의 재미없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가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가 원하면 어디든지 묵묵히 함께 갔다. 도미는 아랑과 함께 하는 시간이 완벽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그런데 느닷없는 왕의 방문이라니. 산꼭대기에서 왕궁은 하찮게 보였다.

짧은 겨울 해가 땅을 비추는 빛이 불길하게 빛나고, 꽁꽁 언 강이 노을빛을 반사해 피처럼 붉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고향 땅이 낯설어 산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았지만, 몰아치는 바람과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의 찬 기운이 견디기 어려워 하산하기 시작했다.

추워서 웅크린 아랑의 어깨에 도미는 목도리를 벗어 한 번 더 둘러 주었다. 그녀가 눈을 맞추며 살짝 짓는 미소가 푸근하여 잠시 걱정을 잊었다. 도미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 여자라면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추워도 산에 올라가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지력이 영묘해서 조상의 무덤과 나라를 지키는 제단이 있는 산에서 도미의 마음은 차돌같이 단단해졌다.


한성 백제 개로왕(21대)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신하들이 대령한 여인의 그림은 도미의 아내 아랑과 거의 비슷했다. 개로왕은 아무리 왕이지만, 남의 부인을 함부로 불러들일 수 없어 좋아하지도 않는 사냥을 나갔다가 다친 척하고 도미의 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본 아랑을 잊을 수 없어 도미를 불러 내기 바둑을 두었다. 도미가 지자, 왕은 그의 목숨 대신 아랑을 궁녀로 삼겠다고 했다. 도미는 아내가 절대로 그리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왕이 다시 아랑을 찾아 취하려 하자 그녀는 사방을 어둡게 하고 하녀를 변장해서 들여보냈다. 속았음을 안 왕은 대로하여 도미의 눈을 뽑고 배에 태워 강에 띄워 보냈다. 다시 아랑을 겁탈하려 했지만, 아랑은 달거리한다고 적당히 둘러대고 미루다 도망쳤다. 강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데 어디선가 배 한 척이 떠내려왔다. 그 배를 타고 가니 한 외딴섬(천성도)에 멈춘다. 그 섬에는 그리운 서방님이 있었다. 그들은 위험한 백제를 떠나 고구려로 가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평화롭게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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