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산 삼정산 (2025년 8월)
건강한 숲은 우리처럼 여름에 땀을 흘린다. 너른 숲의 우둠지에 우거진 초록 나뭇잎이 그늘을 드리우면 흙 속에 수분을 품는다. 나무가 많을수록, 땅에 쌓인 부식토 층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물이 많아진다. 그 물이 증발하면 나무 밑에는 찬 기운이 돌고 이 차가운 공기는 다시 물을 잡아둔다.*
사람이 여름에 땀을 흘리며 더위를 이겨내듯이 나무는 물을 머금어 뜨거운 열기를 식힌다. 더위가 살인적이라고 하는 이 여름에도 산에 갈 용기가 나는 과학적인 근거이다.
‘오르GO 함양’은 경남 함양의 인증 사업이다. 난이도에 따라 포인트가 다른 1,000미터 이상의 산 15개를 올라 인증을 받고 포인트를 받으면 그 합산을 현금으로 준다. 사람들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오기(傲氣)로 산에 오른다. 함양 삼정산으로 가는 산악회 버스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인증하려는 사람들로 꽉 찼다. 연일 폭염이라는 문자가 날아오는 이 여름, 나는 인증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처럼 땀을 흘리는 산에 가고 싶어 친구들 몇 명과 산악회 버스를 탔다. 친구들은 인증이 목표였다. 11km 산행쯤이야 산꾼들과 가뿐하게 다녀오리라 생각했다. 1,000미터가 넘는 가뿐한 산은 없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지만.
지리산 주 능선에서 북쪽으로 뻗은 곳에 있는 삼정산 봉우리의 높이는 해발 1,225m다. 암자가 많아서 7개의 암자를 들르는 빡센 산행이 있는데 우리는 정상에 가면서 두어 개의 암자를 지나가는 비교적 쉬운 길로 걸었다. 도마마을을 통과하는 임도를 지나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오르막이 정상까지 쭉 이어졌다. 100대 명산이 아니라 산길이 분명하지 않고, 나무와 풀은 제멋대로 자라 숲은 신비하도록 고요하고 깊숙했다. 가끔 일행과 떨어져 혼자 걸으면서 귀를 기울이면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소리가 들렸다. 음이온이 많은 곳에는 바위에 연초록 이끼가 자라고, 나뭇잎이 유난히 푸르고 선명하다. 며느리밥풀꽃, 물봉선화가 떼를 지어 피어 노란 나비를 유혹했다. 만물이 사춘기 아이처럼 자라나 자기 향기를 있는 대로 발산하는 계절이었다. 달콤한 아기 냄새가 나던 아들들 방에서 어느 날 시큼한 사내 향이 났다. 아무리 이불을 빨고 청소해도 그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부모 손에서 벗어난 소년이 자기만의 향기를 갖기 시작한 때였음을 그때는 몰랐다. 나무, 풀, 꽃은 아이들처럼 자기만의 독특한 향을 만들어 뿜어내고 있었다.
지리산 자락의 산들은 바위 능선이 거의 없어 순해 보이지만, 뾰족하고 자잘한 돌이 많고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지는 너덜 길이라 걷기 힘들다. 아무리 나무가 땀을 흘려 시원하게 해주어도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우리도, 숲도 열기와 습기를 묵묵하게 참아내었다.
바쁘고 힘들게 내려오는 중에 작은 암자를 지나갔다. 조망이 확 트여 지리산 능선이 보이는 곳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암자가 들어섰다. 젊은 스님 한 분이 햇볕에 무언가를 널다가 내가 인사하자 활짝 웃었다. 빛바랜 회색 장삼을 입은 스님의 미소는 산들바람 같았다. 산속 암자에 사는 스님은 ‘산중 기생’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절에 간 아녀자를 기생처럼 ‘꼬셔서’ 시주하게 한다고 말이다. 잠시 그 생각이 나서 혼자 웃었다. 나도 스님의 미소를 본 순간 들어가 시주하고 싶었으니까.
급경사 돌길을 쉬지 않고 내려와 보니 고맙게도 계곡에 물이 탐스럽게 흘렀다. 우리는 오아시스를 만난 듯 뛰어들어 땀을 씻었다. 시리도록 찬물은 깊은 산의 정기를 전해주었다. 돌길에 시달려 얼얼했던 몸이 노글노글하게 풀렸다.
오랜만에 같이 멀리 가서 어려운 산을 잘 오르고 내려온 것이 만족스러웠던 우리는 뒤풀이를 가서 막걸리를 마셨다. 높은 여름 산에서 받은 신비로운 기운이 우리에게 머물러 초로의 얼굴이 젊은 나뭇잎처럼 윤기가 났다. 산에 다녀오면 나무를 닮는 걸까.
*《나무수업》 (페터 볼레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