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산 설악산 흘림골, 두타산(2025년 10월)
인연에도 때가 있다. 들어맞는 때를 만난 인연을 ‘시절 인연’이라 부른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인간과 사물 사이에도, 사물과 사물 사이에도 각자 정해진 시간이 있어, 제시간이 되기 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산행에서 단풍 든 나무를 만나는 일도 그와 같다. 가을이라고, 단풍을 보겠다고 부푼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가 실망하고 돌아온 날들이 적지 않았다. 사람 사이에도 ‘시절 인연’이 있어서, 만날 사람은 기어이 만나고, 떠날 사람은 붙잡아도 떠나지 않는가. 그 여러 해의 기다림 끝에, 이번 가을 설악산 흘림골과 두타산, 두 거대한 산은 마침내 나에게 단풍과의 인연을 맺어 주었다. 생강나무와 단풍나무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단풍은 산허리마다 횃불처럼 붉게 타올랐다.
설악산 흘림골 탐방로는 하루 5,000명 예약을 받는다. 원정 산행이라 우리는 버스를 빌리고 탐방로를 일찌감치 예약해 두었는데, 하필이면 비 예보가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탐방로는 안전상의 이유로 문을 닫는다. 작년 가을에도 비가 와서 근처까지 갔다가 발길을 돌렸는데, 이번에도 비구름이 설악산 근처에서 맴돌았다. 다행히 하늘이 조금씩 밝아졌다. 비가 온 뒤라 나무와 바위는 막 목욕재계(齋戒)를 마치고 기다리는 젊은 신랑·신부처럼 싱그러웠다. 골이 진 곳이면 어디나 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걸음을 디딜 때마다 가슴 설레는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열었다. 누군가 흘림골이 아니라 ‘홀림골’이 아니냐고 했다. 우리는 정말 홀린 듯이 산을 올랐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춥지 않은 날이라 우산을 받치고 우비를 입은 채 나무와 함께 비를 맞았다. 비에 젖은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단풍 든 나무 아래에서 즐거웠다. 절정을 맞은 산은 가을의 진수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비를 조금 맞으면 어떤가. 먼 길 돌아 마침내 나와 인연을 맺어 주었는데.
두타산에는 몇 번이나 갔지만 베틀 바위까지만 오르고, 정상은 늘 남겨 두었다. 이번에는 정상까지 가 보기로 했다. 그곳은 멀고 험했다. 해발 200미터에서 시작해 1,400미터까지 오르는, 거의 일곱 시간에 이르는 장정이었다. 우리는 식량을 단단히 챙겼다. 산 밑 노점에서 옥수수빵과 김밥을 사고, 과일과 떡, 초콜릿까지 꾸려 넣었다. 바로 전날까지 내린 비 덕에 골짜기마다 신선의 하얀 수염처럼 물이 쏟아져 내렸다. 이번 가을 설악 지역에는 유난히 비가 많았다. 수목은 모처럼 얼굴을 내민 햇볕을 향해 가지를 뻗으며 환호했다. 단풍나무는 루비와 호박 같은 이파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베틀 바위에 닿자, 씨실과 날실처럼 이어진 바위 결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른 시간이어서 아직 사람들로 붐비지 않는 바위의 굴곡은, 비에 씻겨 한층 선명했다.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고됐지만, 형형색색 나무들이 나타날 때마다 힘들다는 마음은 금세 잊혔다.
흘림골에서도, 두타산에서도 어른 손바닥만 한 잎을 샛노랗게 물들인 키 작은 생강나무를 많이 보았다. 우리는 LED 전등불처럼 빛나는 이 나무 앞을 지날 때마다 탄성을 질렀다. 산수유보다 먼저 노란 꽃을 피워 봄을 알리는 이 나무는, 지역에 따라 ‘동백’이나 ‘동백나무’라고도 불린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나무는 사실 이 생강나무다. (붉은 꽃을 피우는 남쪽 지방의 동백나무가 아니라.) 이번 가을 산행에서, 봄을 제일 먼저 열어 알리고, 열매로는 기름을 짜고, 가을에는 환하게 물들어 산을 밝히는 이 나무와 친구가 될 만큼 자주 마주쳤다.
산을 오르며 나무를 많이 보다 보면, 나무가 사람인 듯한 착각이 든다. 어떤 나무는 예쁜 여인의 몸매처럼 수형이 부드럽고 우아하고, 어떤 나무는 키만 멀대같이 큰 싱거운 사람처럼 삐죽 높이 자랐다. 양지바르고 바람이 잘 통하는 자리에 선 나무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처럼 편안해 보인다. 바위 틈새를 비집고 줄기를 비틀어 올리며 윤택한 잎을 매단 소나무는,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겪고 세상사를 통달한 도인(道人) 같다. 아주 느리게 오래 자라는 나무는, 사람보다 훨씬 선명한 얼굴로 고난과 영광의 흔적을 품는다. 나는 산을 바쁘게 오르다가도, 우아한 나무나 힘겹게 자란 나무를 만나면 한 번쯤 손으로 어루만져 본다. 고생했다고, 잘 자라고 있다고, 조용히 응원하면서.
그 순간, 내가 왜 이렇게 기를 쓰고 산에 오르는지 이유를 하나 더 찾았다. 깊은 산 속 나무들과 인연을 맺기 위해서다. 찰나의 연이지만, 그 짧은 스침이 손끝에, 마음 한편에 오래 남는 순수한 인연이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