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 없는 문제도 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

by Claireyoonlee

“과거에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보라”. 영화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감독 조나단 글래이저는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감독상을 받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 감독의 소신 있는 발언은 즉각 극우 시온주의자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협회 회장은 “글래이저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하마스의 야만적인 잔인함과 이스라엘의 정당방위를 동일시한다”라고 비판했다.

최근에 두 권의 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저자 김재명)과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저자 라시드 할리디)을 읽지 않았다면 그들의 논쟁에 별 관심도 없고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멀고 낯선 나라들의 오래된 대립의 역사는 책 두 권으로 나에게 성큼 가까이 왔다. 나는 아우슈비츠 건물 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를 무시하고 평화롭게 사는 회스 소장 가족처럼 담장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인한 살육의 현장을 보지 못한 척하고 살아왔음을 알았다. 나와 내 가족을 돌보기도 바쁜 인생에서 먼 나라의 다툼을 챙기라 하면 오지랖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처럼 담장 너머 죽음의 잔재인 유대인의 뼈가 내 아이들이 노는 강물에 떠내려오고, 고통 소리가 바람에 실려 음울하게 들려오면 외면했던 현실이 코앞에 닥치게 된다.

이스라엘은 숙원을 풀었다. 2,000년도 넘은 신화가 된 기록의 끄트머리를 잡고 땅을 찾아 전 세계의 유대인에게 돌아갈 ‘고향’을 만들어 주지 않았는가. 오래전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유대인은 다른 나라에 살면서도 자신만의 종교와 문화를 지켰다.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는 이유로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유럽의 나라에서 드러내놓고 박해를 받았다. 농사도 지을 수 없어 고리대금업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돈을 많이 벌었고 그래서 더욱 미움을 받았다. 자유, 평등, 박애를 가장 먼저 격렬하게 추구한 나라 프랑스에서조차 유대인은 배신자나 사기꾼으로 몰렸다. (드레이퓌스 사건) 프랑스마저 유대인을 차별하는 현실에 절망한 유대인 헤르츨은 시온주의 사상을 선포하면서 유대인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강대국의 욕망과 어리석음을 이용했다. 영국은 이중 계약을 맺어 아랍과 이스라엘을 분열시켰다.

문제는 그 땅에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족을 이루어 사막을 떠돌던 ‘아랍인’이었다. 그들에게 ‘국가’라는 형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가족을 먹여 살리면서 오랜 세월 대를 이어 평화롭게 살았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핍박받으면서 단련된 유대인에게 그들은 그저 원시 부족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팔레스타인 민족을 무시하고 없었던 존재로 여기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처음 유대인이 자기 땅에 들어오자 함께 잘살아보자고 환영해주었다. 사실 그들은 어떤 땅이나 ‘임자’는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와서 집을 짓고 살면 주인이 되었다. 그러다 이민족이 쳐들어와 쫓아내면 눈물을 흘리며 다른 곳으로 옮겨 타향을 고향으로 삼아 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관대한 팔레스타인을 배신했다. 그들은 정착촌을 세워 조금씩 땅을 차지하고 원주민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식민제국주의는 오래전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팔레스타인에서는 500년 전 미대륙에서 있었던 ‘인디언 잔혹사’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들이 당한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팔레스타인 ‘민족말살’을 자행하고 있다.

조직적으로 후원을 받는 이스라엘에 비해서 팔레스타인이 믿을 만한 나라는 없어 보인다. 주변 아랍국가들은 명분과 실리를 따지기에 급급하다. 미국은 이스라엘 편에 서 있다. 미국의 모든 분야를 쥐락펴락하는 2%의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을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고 ‘정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돕는다. 100년 전쟁에 불을 붙인 영국과 프랑스는 수수방관하고 있다. 처음에 팔레스타인은 이집트나 레바논 같은 아랍국가를 믿었으나 이제는 스스로 극복해 보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그들은 하마스나 헤즈볼라처럼 극렬한 민족주의 종교 집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에 맞서 이스라엘에는 극우 정부가 힘을 얻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시대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두 나라에서는 거의 매일 애꿎은 민간인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인질로 잡히지만, 싸움은 멈추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거주지인 가자와 서안지구에는 이스라엘이 교묘하게 정착촌을 건설하고 팔레스타인인을 차별하고 박해한다.

이번 독서 모임에서 할리디의 책을 선정해 읽고 나서 친구들은 두 나라의 팽팽한 대립의 끝이 보이지 않아서 우울했다고 말했다. 나도 책을 읽는 내내 답답했는데 우울함의 일종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미국에 사는 팔레스타인인인 저자가 제시한 해결책은 콜럼버스가 달걀을 세우는 방법처럼 간단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여 더 답답했다.


팔레스타인 땅에 정의와 더불어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전 세계의 사람들과 나란히,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역사의 궤적을 만들어 낼 것이다. 평등과 정의에 바탕을 둔 이런 경로만이 100년에 걸친 팔레스타인 전쟁을 끝내고 지속적인 평화를 끌어낼 수 있다.


인류는 과연 ‘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