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한강의 소설은 재미있다. 비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한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재미있다'라고 하면 불경스러울지 모르지만, 한번 책을 들면 쏙 빠져들게 하는 몰입감이 있으며 눈물을 흘리게도, 훈훈한 미소를 짓게도 한다. 그녀는 진정한 이야기꾼이다.
10년 전 ≪소년이 온다≫를 처음 발표했을 때, 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로 오디오북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눈물 때문에 녹음할 수 없어서 1장으로 마무리했다고 했다. 나는 무료 배포된 이 오디오북을 처음 몇 분 듣다가 더 이상 듣지 않기로 했다. 내가 사는 세상도 쉽지 않은데 오래전 일로 불편한 마음을 부여잡고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다른 책 ≪채식주의자≫를 대충 읽고 던져놓았다. 그때 나는, 같은 세대인 그녀의 세계를 이해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것 같다.
몇 년 전, 프랑스에 살면서 우리나라 소설을 번역하는 대학 동기를 오랜만에 만났다. 대학 졸업 이후 파리에서 쭉 살아 온 그녀는 빠리지엔느처럼 무채색 옷을 입고 화장기없이 수수한 얼굴에 동그란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녀는 요즘 프랑스에는 한강을 포함한 한국 작가에 관해 관심과 열정이 아주 많다고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지적 허세가 있기는 하지만, 철학적 수준이 높은 프랑스인들이 우리 현대 소설을 읽고 감탄한다고 하니 좀 놀랐다. 그리고 친구가 번역을 잘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다가 한강 작가가 프랑스에서 메디치상, 결국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엄청난 뉴스를 들었다. 나는 아니 에르노나 가즈오 이시구로, 압두라자크 구르나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소설을 좋아해서 번역본을 읽었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작품을 우리 언어로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니! 게다가 작가가 나와 같은 대학을 다녔다는 것, 그리고 나처럼 종로구에 산다는 사실을 알고(집 앞에 “630년 종로의 자랑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서 알았다) 치기 어린 친밀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의 책을 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시, 수필, 단편, 장편 거의 모든 작품에는 “반복과 복잡성”이 우아하게 펼쳐진다. 비슷한 연애소설인데도 그녀가 쓰면 독특하고 유려한 시적인 문장으로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소년이 온다≫는 가장 마지막으로 미루었다. 가장 철이 없으면서도 교만했던 시절, 캠퍼스에서 쉬쉬하면서 돌아다니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웠다. 분명 무언가 알고 있을 광주 출신 친구들도 그 얘기만 나오면 침묵했다. 설마 그래도 아무 죄도 없는 같은 나라 사람을…
소설은 길지 않다. 하지만 글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아득하게 깊다. 시점이 계속 바뀌면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어지럽게 이어지는데 그들은 모두 하나의 혼처럼 보인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여공, 출판사 직원, 시민들, 엄마, 그리고 작가… 모두 “양심이라는 보석을 마음에 품은 단단한 유리” 같은 사람들이었다. 광주에 살았던 사람들은 빨갱이라고 몰려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하거나, 살았어도 꽃 같은 자식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혼이 되어 소설 속을 ‘어른어른’ 떠다닌다. 작가는 그 영혼을 붙잡아 우리 앞에 차례로 세운다.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고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고 애국가를 불렀던 것처럼. 그동안 외면하고 잊으려 했던 사람들에게 부끄러움과 회한을 주려고 한 것처럼.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태어났을까. 이제는 거의 반백 년 전 일이 되어버린 무시무시한 야만적 사건을 빈틈없이 조사하고, 어렵사리 증언을 끌어내 경청하고, 몇 날 며칠을 자료를 읽으면서 그녀가 감당했던 짐은 얼마나 무거웠을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정성을 들여 꼭꼭 짠 한약처럼 글은 새까맣게 찐하고 써서 냉큼 들이마시기 미안했다. 나는 그녀가 골라 쓴 단어와 문장을 한 자 한 자 천천히 여러 번 읽었다. 가끔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했다. 나는 글을 읽고 눈물을 훔치는 참으로 오랜만의 경험을 했다.
다 지나간 일을 들춰서 무엇하겠냐고, 이제는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현재와 미래는 과거라는 발판을 딛고서야 제대로 뻗어나갈 수 있다. 옛날 일이 응어리져 딱딱해져 있다면, 어루만지고 보살펴서 몽글몽글하게 풀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아무리 풀어도 상흔은 선명하게 남겠지만.
45년 전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던 계엄령 발표 후, 사람들은 잘못을 반복할 수 없다는 각오로 최악의 상태를 저지했다. 어린 군인의 군인 같지 않은 머뭇거리는 태도와 장갑차를 몸으로 막는 어른들의 결연한 표정에는 평화를 지켜야겠다는 의지만이 간절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작가가 발견한 한 야학 교사의 의문은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답을 얻었다. 분명 “펜은 칼보다 세다.”(Calamus Gladio Fortior) 그리고 그 펜을 든 작가와 같은 시대를 살아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