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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Oct 18. 2024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어*

12산 오대산 (2019년 1월)

 “우리는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름다움 일부가 되려고 열망한다“ *   

  

C.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에서 ‘나니아’라는 판타지 공간을 만들어 모든 자연물에 생명을 주었다. 우리는 책 속에서 잃어버린 마법의 세계를 찾고 그 일부가 된다. 나는 오대산의 겨울 산에서 공주 같기도 하고 장군 같기도 한 나무와 하얀 용 같은 폭포가 님프가 되어 말을 거는 동화를 상상했다. 깊은 산의 자연은 루이스식 판타지를 자아낼 만큼 경이로웠다. 

서울에서 버스로 2시간이면 진부에서 내린다. 그리고 비포장도로를 터덜거리며 달리는 버스를 타고 40여분 가면 상원사가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부터 오대산 산행을 시작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있는 적멸보궁까지 완만하고 편한 계단이 있어 들머리가 수월했다. 

돌을 조각하는 우리 민족의 솜씨는 뛰어나다. 이탈리아 대리석은 부드럽고, 이집트에서는 다루기 쉬운 석회석을 썼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경도가 높아 섬세하게 조각하기 어렵고, 잘 쪼개지는 화강암을 진흙 다루듯 했다. 적멸보궁으로 가는 계단의 양옆에는 우리 조각가의 섬세한 솜씨가 드러나는 화려한 작품이 줄지어 있었다. 

적멸보궁에는 소박한 비석을 놓아 봉분 밑 어딘가에 진신사리가 묻혀 있다고 말해준다. 가장 고요하고 맑은 깨달음의 경지인 ‘적멸(寂滅)’에 이르기 위해서일까. 어떤 아저씨가 차가운 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얇은 방석만 깔고 앉아 흔들림 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자장율사가 찾은 중국의 오대산과 닮은 장엄한 산 오대산은 새끼를 품는 어미 모양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우리는 적멸보궁의 신성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조용히 둘러보고 내려왔다. 

비로봉까지 오르는 길은 경사가 가팔라서 자주 숨을 고르면서 걸었다. 가까스로 오른 비로봉에서는 설악산이나 발왕산 같은 주위의 유명한 강원도의 산 정상이 희미하게 보였다. 따스했지만 겨울 날씨라 우리는 천막을 치고 점심을 먹었다. 천막은 바람을 막아주어 온실처럼 따뜻했다. 

상왕봉까지 능선을 따라 이동하는 길에는 주목과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있었다. 자작자작 불태우면 잘 탄다는 자작나무는 나뭇잎을 다 떨구고 은빛 몸통을 드러내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었다. 가느다란 몸에 은색 옷을 입은 숲속의 공주가 가녀리지만 힘 있는 팔을 뻗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라면서 스스로 가지치기를 해서 가지가 떨어져 나간 자리가 눈(眼) 모양이라 둥지에 여러 개의 눈이 달려서인지 나무의 꽃말은 '당신을 기다립니다'이다. 자작나무는 우리를 기다렸을까. 

투박하고 굵은 줄기에 짙은 녹색의 잔잔한 잎들이 달린 주목은 우람한 장군 같았다. 껍질과 속, 열매까지 붉은 주목은 영원성의 상징이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천천히 자라고 오래 살아 나중에는 속이 비어 나이테로 나이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사실 '살아서 만년 죽어서 천년'일지도 모른다니 주목이 얼마나 사는지는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사는 인간은 알 수 없다. 오대산 상왕봉 능선에는 기다리는 나무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모르는 나무가 함께 사이좋게 자라고 있었다. 

상원사로 다시 내려오는 넓고 완만한 길은 지루하도록 길었다. (약 6km) 얼었던 만물을 덥히느라 수고했던 해가 산 뒤로 넘어가면서 거대한 산 그림자를 드리웠다. 빠른 걸음으로 내려간 등산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산이 외롭다고 외치는 시간이었다. 안전하고 충만한 산행을 했으니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내려가라고 재촉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간신히 마지막 버스를 탔다. 창밖으로는 하얗게 얼어붙은 계곡이 끝없이 이어졌다. 공주와 장군, 용을 만난 겨울 산행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은 채워지고 나도 아름다움의 한 조각이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갈망을 밖으로 밀어내어 자연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만들어낸다.      

 * ≪영광의 무게≫ C.S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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