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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Oct 25. 2024

연인같은 산

제 13산 한라산 (2019년 2월)

제주 날씨는 시시각각 변해서 기상예보가 별 소용없다. 한라산 주위에 있는 구름이 제멋대로 비를 내리거나 바람에 날려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벽에 서귀포를 나설 때는 눈도 비도 오지 않았는데 백록담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쳐서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면 더 이상 산에 올라갈 수 없다고 했다. 몇 달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한라산행이었다. 온종일 눈이 온다고 하지는 않아서 우리는 무조건 떠났다. 성판악에 도착했더니 어른 주먹만 했던 눈발이 아기 손만 해졌다. 우리는 이런 날씨에 누가 산을 갈까 하고 웃었는데 제법 많은 사람이 단단히 차비하고 산행을 나서고 있었다.


한라산에는 아열대 식물부터 고산지대 식물까지 우리나라 식물 종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1,800 여종의 식물이 자란다. 거기다가 지질학적 가치가 뛰어나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산에 들어서자 군락을 이룬 굴거리 나무의 초록 잎이 갑작스러운 추위에 얼어서 박쥐처럼 매달려있었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갖가지 종류의 나무는 앙상한 가지마다 화려한 흰색의 꽃을 피웠다. 2천 여종의 나무는 눈을 맞아 모두 같이 하얀 나무가 되어있었다. 


David le Breton은 ≪느리게 걷는 즐거움≫에서 “풍경과의 관계는 하나의 시선이기 전에 감정의 반응이다. 각 장소는 걷는 이의 기분에 따라 다양한 감정의 파노라마를 펼친다.”라고 했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다양한 식물들이 자아내는 풍경을 보고 우리는 말을 잊고 저마다의 감상에 빠졌다. 한라산 정상에 올라 보자고 떠난 산행이지만, 백록담을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백록담이 목표가 아니었다. 눈보라 속에서 뽀드득 소리가 나게 눈을 밟으며 걸으면서 설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바랄 것이 없었다. 


진달래밭 대피소가 가까워지자 입산 금지가 풀렸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다. 우리는 대피소에서 잠시 쉬면서 요기를 하고 정상에 오를 준비를 단단히 했다. 산을 덮은 구름 속을 뚫고 올라가니 거짓말처럼 햇볕이 비치고 발아래에 구름의 바다가 펼쳐졌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상고대와 설화가 녹기 직전에 짧아서 더 귀한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날이 따뜻해서 싱싱하게 푸르던 잎사귀 위로 하얀 눈이 앉았고, ‘살아서 천년, 죽어서도 천년’이라는 주목이 오랫동안 메말랐던 가지에 모처럼 하얀 꽃을 피웠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백록담이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해줘서 우리는 신이 났다.


 정지용은 시 '≪백록담(白鹿潭)— 한라산 소묘(素描)≫에서 ‘바람의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데'라고 했다. 시인의 말처럼 백록담에서는 북쪽 나라처럼 거세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천지 바닥에는 얼어붙은 웅덩이가 거울처럼 빛났다. 해발 6,000척(1,950m), 2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해 남은 분화구는 태고의 신비함을 드러내며 겨울의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동안 산의 정상을 제법 많이 올랐지만, 한라산 정상은 특별한 기분이 들어 잠시 앉아있었다. 쨍하게 차가운 바람이 불어도 높은 산에 내리쬐는 날것의 햇볕이 눈이 부시도록 투명했다. 


오래 쉬면 저체온증이 온다고 하는 산림 관리인의 재촉에 관음사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하였다. 완만한 경사의 성판악 코스와 달리 관음사 쪽은 거칠고 가파르다. 북쪽이라 눈도 더 많이 쌓여 미끄럽고 돌이 많았지만, 눈 구경을 하느라 힘든지도 몰랐다. 오대산에서 보았던 자작나무 종류인 사시나무가 경사가 가파른 언덕에 무리를 지어 위태롭게 자라나고 있었고, 왕관 바위는 하얀 가운을 걸친 왕처럼 위엄이 있었다. 


대피소가 흔하지 않은 한라산에 삼각봉 대피소가 오아시스처럼 나타났다. 우리는 잠시 쉬면서 정삼각형 모양인 삼각봉이 안개 속에서 신비롭게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국내 3대 계곡 중 하나인 탐라계곡은 뽀얀 바위 밑에 바다까지 이르는 물을 숨기고 있었다. 눈을 맞고 하얗게 얼어붙은 한라산의 풍경은 우리 마음에 한 컷씩 들어와 고스란히 담겼다. 


지리산은 어머니 같고, 설악산은 아버지 같다면 한라산은 연인같이 가슴이 설렌다. 나는 눈이 온 한라산의 풍경을 마주하면서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하산 길이 길었는데도(8km) 어느덧 산 밑에 이르니 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설화와 상고대가 눈에 어른거려 맹숭맹숭한 겨울나무가 낯설었다. 지금도 산에는 눈꽃이 피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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