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 앤드 슬레이브(Masters and Slaves)】
김중본씨는 부자입니다. 그것도 대단한 부자입니다. 현재 시제를 사용한 이유는 그가 지금도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김중본씨는 과거에는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의 부인은 두 명이고, 자식들은 다섯 명입니다. 대단한 미인이자 전문직(아마 변호사인 걸로 기억합니다.)인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한 명과 딸 한 명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부인(정말 정말 대단한 미인이자 전문직(아마 의사)인 걸로 기억합니다.)과의 사이에 아들 한 명과 딸 두 명을 두고 있습니다. 둘째 부인은 첫째 부인의 얼굴이며, 이름이며 등등 다 알고 있지만, 첫째 부인은 둘째 부인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둘째 부인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김중본씨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김중본씨는 첫째 부인과 두 아이들을 데리고 작년에 휴가를 갔다 왔습니다. 지난 해 여름에 밀레니엄 아일랜드에 가보았던 거지요. 아! 다들 잘 모르시겠지만,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휴양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비싼 휴양지이기도 하지요. 특급 호텔, 그것도 아주 최상급의 특급 호텔이 있는 밀레니엄 아일랜드의 해변은 럭셔리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섬을 개발한 밀레니엄 컴퍼니에서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들여서 무인도에 최고급 휴양지를 조성하였고, 역시 어마어마한 자금을 들여서 온 세상에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작년 여름에 개장하자마자 세상에서 돈 푼 깨나 있다는 부자들은 다들 여기로 와서 휴가를 즐겼습니다. 무척 비쌌지만, 그런 비용은 김중본씨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번 여름에는 둘째 부인과 세 아이들을 데리고 역시 밀레니엄 아일랜드에 가기로 계획을 짰습니다. 첫째 부인에게는 회사의 아주 아주 그것도 아주 중요한 회의 때문에 남극에 갈 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휴대폰이 되지 않을 뿐더러, 인터넷조차 안 될 거라고 미리 말해두었습니다. 첫째 부인이 이것에 대하여 믿거나 말거나, 그런 것은 김중본씨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밀레니엄 아일랜드에 도착한 김중본씨 일행은 밀레니엄 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77층의 스위트룸에서 바라보는 해변의 전경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무지개처럼 보이도록 윗면이 칠해진 비치파라솔들이 질서정연하게 해변의 모래사장을 따라 늘어서 있었습니다. 호텔의 룸에서는 보이지가 않았지만, 아마도 그 비치파라솔 아래에는 근사한 선베드가 두 개씩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베드의 왼쪽에는 버튼이 달려 있을 것이며, 이 버튼을 누르면, 누군가가 달려와 김중본씨의 앞에 얌전히 설 것입니다. 그 다음 김중본씨가 그녀에게 말을 하면, 그녀는 그의 모든 주문을 질서정연하게 해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에게 맛있는 음식이나 음료를 가져다 줄 때마다, 김중본씨는 수영복의 방수 주머니에서 지폐를 한 장씩 꺼내어 그녀에게 팁으로 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씀씀이는 돈이 아주 많은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근사한 점심 식사를 마친 김중본씨 일행은 일제히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으로 나섰습니다. 미리 예약이 된 파라솔 밑으로 가서 자리를 잡은 김중본씨는 일행의 짐을 들고 온 포터에게 팁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포터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사라졌습니다. 옆의 선베드에 누워 있는 아리따운 둘째 부인을 보며 김중본씨는 미리 준비해간 책을 펼쳤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어떤 작자가 쓴 책인데, 감히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뭐라 뭐라 주저리주저리 써 놓은 책이었습니다. 김중본씨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순전히 책의 제목이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둘째 부인에게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아주 조금은 있었습니다. 세 아이들은 벌써 해변을 달려가더니 푸른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마 한 시간 정도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여쁜 부인과 입맞춤을 나눈 김중본씨는 책을 읽으려고 선베드에 편하게 누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제야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김중본씨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파라솔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수 백 개의 파라솔들이 겨우 절반 정도나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올해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호텔 로비가 왜 그렇게 시장 바닥 같았는지 이해가 된 그였습니다.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음은 김중본씨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그에게 아주 커다란 문제가 되었습니다.
휴가를 망쳐버린 김중본씨는 회사로 돌아와 자기 사무실에서 아주 길고 아주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뭔가 방법을 강구하여 실행하지 않으면, 앞으로 김중본씨의 아름다운 휴가는 절대 보장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돈이 많은 게 문제야. 아니, 돈이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게 문제야. 아니, 아니야…….’ 김중본씨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리카락이 더 빠지면, 지금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미래의 세 번째 부인이 좋아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아주 커다란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의 행복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문제가 될 것입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김중본씨는 계속 생각했습니다. 사람.... 돈.... 사람.... 돈.... 뭐가 문제일까? 뭐가 먼저일까?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번개가 몰아쳤습니다. 돈은 계속 찍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사회에 돈의 개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도 계속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숫자보다 돈의 숫자가 더욱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김중본씨의 생각은 여기까지 진행했습니다. ‘난 아주 조용하고 편안한 휴가를 보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섬에 사람들이 많이 오면 안 된다. 그 비싼 비용을 지불할 사람들의 수를 줄여야 한다. 돈은 계속 찍어져 나온다. 그건 내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이번에는 김중본씨의 머릿속에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김중본씨는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곧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어디에선가 손이 나와서 그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아주 고운 손들이었습니다. 전혀 고생을 하지 않은 손들이었습니다. 순간 퍼뜩 정신이 든 김중본씨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백 명도 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모두 밀레니엄 아일랜드에 가서 휴가를 보내고 싶어 했습니다. 작년에는 그 친구들의 대부분이 밀레니엄 아일랜드로 휴가를 왔었기 때문에, 김중본씨는 친구들과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친구들의 절반의 절반도 거기에 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아주 커다란 문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아주 커다란 문제가 될 것이 확실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근무하는 어느 평일 날, 갑자기 밀레니엄 아일랜드가 시끄러워졌습니다. 김중본씨는 작은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섬에 착륙했습니다. 그의 옆에는 예쁜 부인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함께 걸어가는 친구들 역시 전부 작은 가방 하나씩만 들고 다들 조용히 길을 걸었습니다. 밀레니엄 호텔 전체를 빌린 김중본씨와 그의 친구들은 최상층 꼭대기에 자리 잡은 라운지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주제는 간단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최고급 삶을, 제한된 숫자의 사람들만이 조용하고도 여유롭게 누릴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금방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사람들이 돈보다 더 좋아할 만한 것을 주면 되는 거였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마구 마구 던져서 사고 싶어 하는 걸 주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돈을 가장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중본씨와 친구들은 새로운 돈을 만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제 이 새로운 돈이 현재의 돈보다 더 좋다는 것만 광고하면 되는 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