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경찰 분서의 조그만 유치장은 네모난 공간이었다. 한쪽 벽 쪽에 화장실로 쓰이는, 그래도 칸막이는 있는 자그마한 공간이 자리를 차지했다. 줄리어스는 사방이 사오 미터 정도 되는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줄리어스는 큰 소리로 경관을 불렀다. 체구가 날씬한 경관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유치장 창살 너머로 그를 들여다보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줄리어스는 깜짝 놀랐다. 여자였다. 그 순간 그는 심하게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그, 그게....... 지, 지, 지도.......”
“뉴욕 지도를 보고 싶군요?”
봉긋한 가슴을 살짝 쳐다보니 왼쪽에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N. 브라운’
줄리어스는 얼굴이 빨개지며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나는 낸시에요. 낸시 브라운. 여자 경찰 처음 봐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그윽한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아니면 혹시......, 여자를 처음 보나요?”
낸시는 줄리어스에게 눈을 흘겼다. 줄리어스는 허리를 쭉 폈다.
“아니, 그게, 여자를 처음 본 것은 아니고....... 이렇게 예쁜 여자를 처음 봐서 그럽니다. 부탁합니다.”
낸시 브라운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말까지 더듬고 그래요? 그리고 내가 예쁜가요?”
낸시 브라운은 살짝 눈웃음을 치며, 줄리어스를 보았다. 낸시의 얼굴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녀는 줄리어스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줄리어스는 낸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려갔다. 갈색 머리, 갸름한 얼굴, 경찰 제복의 살짝 들어간 허리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 그녀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가슴을 젖히며 말을 이었다.
“직업도 구해야 하고, 아무래도 지도를 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어머, 그래요? 아직 직업도 없는 백수군요.”
“백수라니요? 잠시 쉬고 있을 뿐입니다. 뉴욕에 처음이거든요.”
“호호호, 그래요. 내가 지도를 가져다주지요. 그럼 나한테 뭘 줄 건가요?”
갑작스런 낸시의 말에 줄리어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사뿐히 돌아서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점심이다. 이건 공짜니까 맘대로 먹어도 돼. 이 도둑아!”
줄리어스에게 큼직한 햄버거가 하나 나왔다. 속에는 자그마한 고기 덩어리도 들어 있었다.
그는 햄버거를 입에 우겨넣으며, 눈으로는 뉴욕 지도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경찰서 안의 전등이 하나씩 켜졌다. 뉴욕 지도를 유치장 바닥에 놓고 보고 있던 줄리어스는 고개를 들어 창살 밖을 바라보았다. 두 명의 경관이 덩치가 큰 남자 하나를 끌고 왔다. 그들은 유치장 문을 열더니 덩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덩치는 줄리어스 앞으로 지나가면서 지도 위를 흙이 잔뜩 묻은 신발로 밟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줄리어스를 째려보았다.
“치워.”
줄리어스는 벌떡 일어나서 덩치의 뒤통수를 때렸다. 뒤통수를 맞은 덩치는 양 손으로 줄리어스를 잡았다. 그러나 줄리어스는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덩치가 오른 주먹을 날렸다. 줄리어스는 그 손 밑으로 파고들며 덩치의 턱에 왼손 한 방을 먹였다. 큰 체구가 흔들렸다. 다음 순간 줄리어스는 한 발 다가서며 왼 팔꿈치로 상대의 얼굴을 가격했다. 덩치의 얼굴이 뒤로 젖혀졌다. 상대의 왼쪽으로 돌아선 줄리어스는 상대의 왼쪽 손목을 자신의 왼손으로 잡고 누르면서, 동시에 오른발로 덩치의 왼 무릎 뒤 오금을 찍어 눌렀다.
“윽, 으으윽.”
덩치는 왼발이 접혀지며 땅에 왼쪽 무릎을 꿇었다. 줄리어스는 상대의 왼팔을 뒤로 꺾었다. 덩치는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고 버텼다
“이 자식아, 팔을 뜯어 줄까?”
줄리어스는 뒤로 꺽은 팔을 위로 확 들어 올렸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허둥지둥 경관들이 달려 왔다.
“이 도둑 새끼가....... 이제는 싸움질까지 하네.”
줄리어스는 유치장에서 끌려 나왔다. 경관들이 그를 둘러싸고 때렸다. 주먹과 발이 날아왔다. 몸을 웅크리며 얼굴과 복부를 가렸으나, 줄리어스는 금방 바닥에 널브러졌다. 캑캑거리는 그를 경관들이 옆방으로 질질 끌어갔다. 방금 전에 있었던 방과 벽 하나 사이였다.
14.
새벽이 되었다. 도서관 앞 계단에 앉아 있는 줄리어스는 온 몸에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 스튜어트 중위와 스티븐스 대령은 공터에 앉아 있었다. 도서관 안에서 클린스 중위가 달려 나왔다. 피곤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그의 눈빛은 반짝였다.
“줄리어스, 끝났다.”
“수고했어, 톰.”
줄리어스는 클린스 중위의 어깨를 툭 치며, 앞장을 서도록 했다.
마이클 스티븐스 대령과 세 명의 소대장들, 존, 줄리어스 그리고 톰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섰다. 아래쪽으로 사람 두 명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통로가 보였다. 통로는 3 미터 정도 내려가다가, 반대 방향으로 휘어져 있었고,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지하로 들어가는 문이 완전히 굳어 버려서 뜯어내 버렸습니다. 대령님.”
톰이 차려 자세로 말을 하였다.
“그랬더니 커다란 공간이 나왔습니다.”
대령은 가만히 뒤를 돌아보더니 로비 여기저기에 앉아 있는 부대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세 명의 중위들은 각자 횃불을 들었고, 대령이 앞장서서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실은 캄캄했다. 창문 하나 없었다. 하나의 방. 군데군데 기둥들이 있었다. 하얀 선들이 바닥에 네모나게 그어져 있었으며, 다 썩어버린 자동차들이 몇 대 보였다. 들어온 문 반대편 쪽에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가 보였다. 그곳은 무너진 건물 잔해와 각종 쓰레기들로 막혀 있었다.
막혀 있는 통로의 왼쪽 방향 모서리에 육면체 모양의 검은 물체가 있었다. 대략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3 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대령은 천천히 다가가 손으로 그 물체를 쓰다듬었다.
“드디어 찾았구나.”
대령은 ‘푸’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숨을 몇 번 내쉬더니 스티븐스 대령은 말을 꺼냈다.
“제군들도 조금씩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인간 사회는 예전에, 그러니까 70 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어. 살기 좋았는지 어쨌는지는 관두고, 사람들은 문명이라는 것을 이룩하여, 그러니까 각종 도구들을 이용하면서 살았다네. 웃기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정말 찬란한 문명이었지. 사람들은 기계의 힘을 빌어서 자신들의 육체적 노동을 거의 없애 버렸다네. 짧은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일을 하고, 긴 시간 동안 놀았어. 과거 인간의 삶이 일하는 삶이었다면, 그때 인간의 삶은 노는 삶, 바로 그 자체였다네.”
세 중위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대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모습을 봐. 낡아빠진 옷을 입고, 병영이랍시고 숲속의 오두막에 살고 있잖아. 여름에는 더위에 지치고, 겨울에는 추위에 벌벌 떨어. 또 먹을 것은 풍족한가? 다들 열심히 일을 하지 않으면 배부르게 먹지도 못해. 어쩌다가 동물을 잡으면 파티를 하지.”
대령은 잠시 말을 쉬었다.
“제군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떠올려 봐. 나 역시 그 전쟁 전의 세상에 살아보지 않아서, 그 시절이 얼마나 좋았는지, 지금에 비한다면 얼마나 편리했는지 상상이 잘 안 돼.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가진 게 뭐가 있지? 그리고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전쟁? 이 지긋지긋한 전쟁? 인간의 문명을 송두리째 무너뜨려버린 것이 전쟁인데, 우리는 지금도 그 전쟁을 하고 있잖아.”
검은 물체의 한쪽 면에 네모난 사각형의 그림이 보였다. 스티븐스는 그 부분에 자신의 오른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사각형 그림의 왼편으로 작은 발판들과, 발판들의 양옆으로 수직 손잡이가 두 개 생겨났다. 그리고 물체의 윗면에서 ‘위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등을 보이고 서 있던 대령이 돌아서자, 세 중위들은 깜짝 놀랐다. 대령의 얼굴에는 싸늘하기는 하지만 한 줄기 미소가 서려 있었다. 줄리어스는 대령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다면, 제군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러나 세 중위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혹시 전기에 대하여 들어 보았나?”
스티븐스 대령이 말을 이었다.
“전기라면 전기 에너지를 말하는 것입니까?”
존이 딱딱하게 다시 물었다.
“그렇지. 옛날 사람들은 전기 에너지를 이용하여 편리하게 살았어. 세상의 거의 모든 기구들이 전기로 동작했다네. 난방도 냉방도 전기로 하고, 음식도 전기로 만들고, 멀리 떨어진 사람과도 전기 에너지를 이용하여 대화도 할 수 있었어. 전기는 태양으로부터 충분히 얻어낼 수 있었으니까. 모든 사람들이 여유롭게 에너지 부족 없이 잘 살았어. 그리고 빛도 사용했다고 하네. 몇몇 특정한 기기들은 전기 없이 태양빛만으로도 잘 작동했다네. 대단하지? 자네들, 상상이 가나?”
줄리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전기가 없다고 해서 우리가 살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기가 있으면, 만약 우리가 전기를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만약 우리가 발전소를 세울 수만 있다면, 인류는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있을 걸세.”
대령이 야전 점퍼의 안쪽 주머니에서 작은 편람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존에게 주더니 말을 이어 갔다.
“다들 이 책을 읽어 봐.”
세 명의 장교들은 대령이 준 자그마한 편람을 보았다. 앞 장이 떨어져 나가 제목조차 없었다. 스티븐스 대령은 검은 상자를 다시 한 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서 세 명의 장교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