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바닥에 드러누운 낸시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다시 누워 버렸다.
“으으으, 다리 저려. 그렇게 깔아뭉개면 어떡해요?”
줄리어스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로 부축을 한 다음,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주었다. 그러면서도 줄리어스의 눈길은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날씬한 두 다리를 쫓고 있었다.
“보지 마세요.”
낸시는 줄리어스를 밀었다. 그는 힘없이 그녀의 뒤로 밀려났다. 낸시는 치마를 내리고 천천히 두 다리를 접었다. 줄리어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순간 낸시가 홱 돌아보았다. 줄리어스와 낸시의 눈길이 부딪혔다. 줄리어스는 그녀를 계속 응시했다. 낸시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옆에 남자 한 명이 누워 있었다. 얼굴은 천장을 향하고 눈을 치켜뜬 채로. 남자의 벌어진 입에서는 혀가 늘어져 있고 침이 줄줄 흘렀다. 낸시는 외면했다. 오른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줄리어스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아파트 현관으로 가더니 문을 닫았다. 뒤로 돌아서자, 그를 보는 낸시의 눈이 커져 있었다. 줄리어스는 낸시에게 다가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헉!”
낸시의 손이 줄리어스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줄리어스는 거실 옆에 보이는 문을 발로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녀를 침대에 던졌다. 그리고 발로 문을 닫았다. 낸시의 눈이 커졌다. 줄리어스는 침대로 올라가 그녀를 덮쳤다.
“아악! 그만둬요!”
낸시는 몸부림을 쳤다. 줄리어스는 그녀의 양 팔을 잡았다. 두 무릎으로 단단히 그녀의 다리를 죄었다. 낸시는 두 발로 요동을 쳤다. 낸시의 왼손을 놓은 줄리어스는 그녀의 목을 잡았다. 낸시의 고개가 젖혀졌다. 그녀의 다리가 멈췄다. 줄리어스는 낸시에게 키스했다. 그녀가 조용해졌다. 그는 얼굴을 들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당신, 정말 예쁜데.......”
낸시는 울기 시작했다.
“나한테 왜 그래요? 흑....... 제발 그만 둬요.”
“도와준 대가로 키스 정도 어때?”
줄리어스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하더니 낸시의 옆으로 내려앉았다. 낸시는 재빨리 몸을 일으킨 다음 이불을 당겼다. 꽃무늬가 그려진 분홍색이었다.
“당신, 대체 누구에요?”
“.......”
“구해준 거, 고마워요. 정말이에요.”
낸시가 조그맣게 말했다. 줄리어스는 가만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둘의 눈길이 마주쳤다.
“미스 브라운,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따라왔는데, 경찰서에서부터 따라왔는데....... 길에서 이 남자가 당신을 따라가는 걸 봤어요. 이 남자가 당신을 따라 건물로 들어가더군요. 그래서 나도 따라 왔습니다. 그런데 집이 조용하기에....... 그래, 난 밖에서 보았어요. 슬쩍 엿보았더니.......”
줄리어스는 횡설수설했다.
“나를 따라왔어요? 왜 그랬어요?”
“.......”
“설마, 나를 어떻게 하려고?”
낸시는 침대 뒷벽에 바짝 붙었다. 줄리어스는 눈썹 위를 긁었다. 낸시는 침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줄리어스는 그런 낸시를 보았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침실 밖으로 나갔다.
낸시가 거실로 나왔다. 손을 뒤로 돌려 침실 문을 닫았다. 그녀는 벽에 기댔다.
“당신 이름....... 줄리어스 애슬로우....... 맞지요? 낸시라고 부르세요. 나를 구해준 거 정말 고마워요.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릴게요.”
낸시가 말을 꺼냈다. 줄리어스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낸시는 조심조심 걸어와서 소파에 앉았다. 줄리어스도 그녀 곁에 앉았다.
“먼저 이 남자를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줄리어스가 말했다. 그는 일어나 식탁으로 갔다. 식탁 위의 물건들을 식탁 의자로 옮겼다. 그 다음 식탁보를 가져와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덮었다.
“저 남자는....... 제임스 린든. 나쁜 놈이에요.”
“아, 그런가요?”
“줄리어스, 나는 경관이에요. 알고 있지요? 경찰서에서 봤으니까. 당연히 신고를 해야 합니다. 당신은 나를 도와줬지만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줄리어스는 잠자코 있었다.
“실은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을 찾으러 여기 뉴욕에 왔습니다. 아마 혼자 살고 있을 거예요. 외롭게 계시는 그 분을 만나서 모셔가고 싶어서 온 겁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저 멀리 남쪽에 있어요. 멕시코 근처랍니다.”
줄리어스는 대충 둘러댔다.
“그런데 당신은 경관이니까, 이름을 알려주면 주소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따라온 겁니다. 당신이 나에게 지도도 보여주고 해서, 부탁하면 들어줄 것 같았거든요.”
낸시는 한숨을 쉬었다.
“내일 아침에 출근할 예정이지만, 지금 당장 살인 사건을 신고하러 경찰서에 가야해요. 같이 가서 사건에 대한 조서를 작성한 다음, 당신 할아버지를 찾아보면 어때요? 걱정 마세요. 당신이 나를 구해준 것이 사실이니까. 그러면 당신은 뉴욕 시경으로 이송된 다음, 기소가 되고 재판을 받겠지만, 내가 증언을 할 거니까 분명 무죄로 풀려날 거예요.”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낸시는 잠시 침묵했다.
“글쎄요, 한 육 개월 정도 걸리지 않을까요?”
줄리어스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닥에 놓여 있던 린든의 칼을 집어 들었다.
“낸시, 시간이 없어요. 이제 삼 일도 채 안 남았단 말입니다. 난 당신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부탁도 하려고 따라 왔지만, 다시 경찰서에 갈 수는 없습니다.”
낸시는 소파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신, 대체 누구에요?”
낸시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줄리어스 애슬로우. 맨해튼 사단 스티븐스 연대 소속. 계급은 중위. 군번 93348815. 미래에서 온 군인이야. 쳇,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안 믿을 테지만....... 사실이야. 여기 뉴욕에 누구를 찾으러 왔거든. 그러니 그대가 날 도와주어야 해. 알아들었어?”
줄리어스는 얼굴을 낸시에게 들이댔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와줄 거야, 말 거야?”
줄리어스는 큰 소리를 냈다. 낸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리어스는 혀를 차더니, 거실 한쪽의 책상으로 갔다. 종이와 연필을 집어든 그는 쓰기 시작했다. 그 다음 낸시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이 사람이야. 찾아봐 줘. 부탁이야.”
“.......”
“오늘 밤에 다시 올 거야.”
줄리어스는 낸시를 그대로 둔 채 아파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세 번째 문이 스르르 닫혔다.
28.
낸시의 아파트에서 나온 줄리어스는 주택가를 지나서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 골목으로 향했다. 손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줌마, 전당포가 어디요?”
길거리에서 야채를 팔고 있던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인상 좋은 여인네는 줄리어스를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손으로 길 저편을 가리켰다.
“저기 가 봐요. 그리 썩 좋은 곳은 아니지만, 맡길 것만 확실하다면 돈을 줄 거예요.”
그녀는 길 건너 석조 건물을 가리켰다. 2층에서 3층에 걸쳐 대출(LOANS)이라 쓰인 간판이 걸려 있고, 창문 하나가 밖으로 열려 있었다. 줄리어스는 건물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중위, 만약에 비상사태가 발생하여 몸을 숨겨야 한다면 이것을 사용하게나.”
스티븐스 대령은 줄리어스에게 가죽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이것은 금 덩어리인데 위에다 고리도 만들었어. 그리고 고리에다 가죽 줄을 꿰었지. 금 조각 하나의 무게가 대략 20 그램 정도야. 다섯 개가 달려 있으니까 돈으로 바꿔서 사용하도록.”
그리고 대령은 힘주어 덧붙였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탐내니 절대적으로 조심해야 돼.”
* * *
전당포 안에는 안경을 쓰고서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고,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테이블 둘레에는 세 명의 남자가 모여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실내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줄리어스는 검은색 조각 하나를 손에 쥐고 카운터를 탁탁 쳤다.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더니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았다.
“돈으로 바꿔 주시오.”
카운터에 툭 하고 떨어진 검은 조각을 본 전당포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뭐요?”
줄리어스는 검은 조각을 다시 보았다.
“칼을 잠깐 빌릴까요?”
전당포 남자는 카운터 뒤의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자그마한 주머니칼을 가지고 나와 줄리어스에게 건넸다. 줄리어스는 검은 조각의 표면을 칼로 살살 긁었다. 그러자 검은색 껍질이 벗겨지면서, 그 밑으로 노란 빛이 보였다. 남자는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고개를 돌려 테이블에서 카드를 하고 있던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한 명이 슬그머니 일어서더니 줄리어스의 옆으로 다가왔다. 전당포 남자는 작은 저울을 꺼내서 줄리어스가 내려놓은 금 조각의 무게를 달았다. 그러고 나서 안경을 고쳐 쓰더니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거 진짜 금이군. 무게는 20 그램 정도 되는걸. 이런 걸 어디서 찾았을까? 서부에서라도 왔나?”
테이블의 나머지 두 사람도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카드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이쪽에 호기심이 잔뜩 동한 표정들이다.
“이걸 맡길 건가요? 아니면 팔 건가요?”
줄리어스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맡기면 15 달러, 판다면 20 달러를 드리지.”
줄리어스는 1 달러 지폐 스무 장을 받아 들고 전당포를 나섰다. 길을 건넌 줄리어스는 방금 나온 건물 1 층에서 누군가 뛰어나오는 광경을 보았다. 카드를 하던 세 명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