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줄리어스 애슬로우는 다음의 세 가지 항목으로 기소되었다.
국가에 대한 스파이 혐의와 제임스 린든 살인 혐의 그리고 니콜라 테슬라 납치 혐의.
재판은 육 개월이 걸렸다.
줄리어스가 독일이나 일본 또는 다른 어떤 나라에서 온 스파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조지 윌리엄스(연방 수사국 요원)의 동료 한 명이 녹음기를 찾으러 뉴요커 호텔 3327 호를 방문하였으나, 소파 밑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호텔 직원에게 물어보니, 테슬라의 요구대로 항상 방 청소를 깨끗이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아울러 줄리어스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었다. 줄리어스는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외국 대사관들에서도 줄리어스 애슬로우에 대하여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 대해서 신기하게만 생각하였다. 결국 그가 어렸을 때 누군가의 실수로 - 아마 부모의 실수일 테지만 - 그에 대한 기록이 누락된 것으로 인정되었다. 아울러 그는 기억 상실증이라는 진단도 받았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국가의 잘못도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서, 연방 정부는 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제임스 린든 살인 사건은 낸시 브라운을 구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인정되었다. 그 방법이 과도했지만, 이것 또한 줄리어스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는 쪽으로 인정이 되어서, 고의가 아닌 과실 치사로 처리되었다.
니콜라 테슬라 납치 혐의에 대한 문제는 상당히 난해하였다. 먼저 테슬라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대관절 어디로 갔는지를 경찰도 연방수사국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시체조차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경우는 살인 사건이 될 수 없었다. 줄리어스는 자신이 테슬라의 뉴요커 호텔 3327 호를 방문한 것은 사실이며, 테슬라와 함께 세인트 조지 도서관 센터까지 왔으나, 여기서 그와 헤어졌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그가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였다. 다만 테슬라가 분명히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논란의 불씨를 남겼다. 그리하여 웨스팅하우스사에서는 테슬라를 위하여 매달 125 달러씩 지불하고 있던 뉴요커 호텔 3327 호를 당분간 그대로 두기로 결정하였다.
재판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뉴욕 하급 법원은 줄리어스 애슬로우에 대한 스파이 혐의와 니콜라 테슬라 납치 혐의에 대해서 무죄 판결을 내렸으며, 제임스 린든 살인 사건은 과실 치사이지만, 현직 경관을 위험에서 구한 공로를 인정하여, 징역 3 년에 집행유예 4 년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검찰은 항소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1943 년이 되었다.
1 월 5 일 오전 열 시 경, 뉴요커 호텔 3327 호에서 안내 데스크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룸서비스를 주문하고 싶은데....... 2 인분으로. 그리고 손님이 한 명 올 거니까 안내를 부탁해.”
1 월 7 일, 호텔 메이드인 앨리스 모나간이, 테슬라가 이틀 전에 방문 앞에 걸어두었던 ‘방해하지 마시오.’ 라는 표지판을 무시하고 방에 들어갔다가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1 월 9 일 연방수사국은, 테슬라가 미국 시민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류외국인 재산보관소(Alien Property Custodian)’에 테슬라의 모든 소유물들을 압수하라고 명령하였다. 뉴요커 호텔과 뉴욕시의 다른 호텔들에 있던 테슬라의 모든 재산은 ‘맨해튼 창고 회사(Manhattan Storage and Warehouse Company)’로 옮겨졌다.
그리고 FBI는 모든 것들을 샅샅이 조사하였다. 관찰력이 좋은 한 요원이 뉴요커 호텔 3327 호의 거실 카펫 위에서 가로 세로 3 미터 정도의 네모나게 눌린 자국을 발견하였지만, FBI는 이것을 무시하였다.
날씨가 화창한 1943 년 어느 봄 날, 줄리어스 애슬로우와 낸시 브라운은 야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뉴욕시경 월 스트리트 경찰서뿐만 아니라 브라이튼 경찰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결혼식장의 나무 그늘 밑에 찰리(조지 윌리엄스)도 서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스탠 로저스와 토머스 잽스도 참석하였다. 목발을 짚은 토머스 잽스 2세도 왔다.
행복한 신부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묻자, 신랑은 군인이 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신부는 신랑으로부터 검은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선물 받았다.
봄이 가고 여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신혼집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줄리어스는 그 손님을 반갑게 맞이한 다음, 그와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리고 창문도 하나 없는 상자 안에 갇혀서.......”
다시 시간이 흘러, 1945 년 8 월 6 일 오전 8 시 15 분,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단 한 발의 폭탄으로 이 날 하루에만 7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으며, 도시 하나가 사라졌다. 그리고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과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이긴 쪽 대표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였으며, 진 쪽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었다.
30년이 흘러, 1975 년 프랑스의 대통령 지스카르데스탱(Valery Giscard d'Estaing; 1926~2020)이 6 개국 정상들을 초청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G6(Group of Six)가 탄생되었다.
초청된 나라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서독), 이탈리아, 일본이었다. 이긴 편과 진 편이 함께 모여서 정답게 식사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이 세상을 주무르기 시작하였다. 예전의 전쟁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있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어차피 전쟁에 주도적으로 끼지도 못할 정도의 나라들은 애당초 그들의 관심 밖이었으므로.
싸움을 한 상대에 대해서는 승부를 떠나서 나와 동급으로 치는 것이 불문율이다. 덤비지도 못하는 상대는 처음부터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싸움의 생리이며, 전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음해 1976 년 캐나다가 참여하여 이 모임은 G7(Group of Seven)이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