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힘
언어는 마술의 도구다.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기도 하고
달콤한 사랑을 얻는 큐피드 화살이 되기도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도 하고
귀를 닫아버리게도 한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이 있는가 하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처럼
말과 관련한 속담은 오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이다.
외국어의 힘은 더 크다.
역사와 문화, 환경은 달라도 한 가지 언어로 소통할 때 사람들은 더 공감하고 일체감을 느낀다.
외국인이 우리말로 이야기할 때 더욱 그렇다.
2006년 즈음 일본의 한 영화관에서 인터뷰했던 일본인 관객이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한국인이어서 좋으시겠어요. 자막이 아닌 소리로 영화를 보고 들을 수 있어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와 그녀의 기억을 채워주려는 남편의 애끓는 사랑 이야기를 그린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를 보며
필자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자막도 일본인 관객들에게 같은 감동을 전했을까?
"한국 사람들이 너무 부럽다"던 그 일본인 중년 여성의 말 한마디는 '언어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설명해준다.
얼마 전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외교 행사에서도 언어의 힘이 확인됐다.
'한·중남미 수교 60주년 기념 특별 포럼'에 참석한 한국 외교부 장관의 개회사에 주한 대사들 사이에서는 놀라움과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연단에 선 박진 장관이 스페인어로 연설을 했기 때문이다.
간단한 인사말 정도에 그친 게 아니었다.
무려 10분 가까이 되는 연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스페인어로 했다.
내용은 우정과 신뢰 이야기였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칠레 출신의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시구도 읊었다.
"우정은 온전한 이해이며 즉각적 신뢰이자 오래 기다린 추억"
중남미 국가 대사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쏟아져 나올 만도 했다.
스페인어로 연설을 한 사람은 역대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 중 박진 장관이 처음이었다.
박 장관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는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스페인어 원고를 성의 있게 읽어 내려가면서 대사들 한 명 한 명씩 눈 맞춤을 한 그에게 찬사가 쏟아졌던 것이다.
포럼이 끝나고 악수를 나누는 대사들마다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서 곤혹을 치렀다고 박 장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박 장관의 언어의 힘은 취임 직후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첫 화상 통화를 했을 때도 작동했다.
처음부터 인사말로 중국어를 했을 뿐 아니라 미리 준비한 이야기를 중국어로 다 소화했다.
박 장관의 기습 중국어 '도발'에 굳어 있던 왕이 부장의 표정은 어느새 밝아졌다.
그리고는 말했다.
"박 장관이 친미파인 줄 알았더니 지중파이군요"
박 장관은 그날의 화상 통화를 위해 외교부 내 중국어 능력자를 섭외, 하고 싶은 말을 중국어로 부탁했다.
번역에 그친 게 아니라 읽어서 녹음 파일을 보내라고 했고 그 직원의 발음을 밤을 새우며 수십 차례 듣고 따라 했다.
중국어 특유의 4성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려고 한 그의 성의에 왕이 장관은 놀라움과 함께 친근감을 느꼈을 것이다.
정권 교체로 인해 생긴 부정적 선입견을 단번에 호감으로 바꿔놓는 마술 같은 힘을 언어가 발휘했을 것이다.
박 장관의 영어 실력이야 자타가 공인하는 최정상급이다.
YS의 비서관을 하면서 정상회담 때마다 통역을 전담했던 그였다.
존 메이저 영국 총리가 "박진의 영어는 영국 내각의 어떤 각료보다 훌륭하다"고 치켜세웠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성문종합영어 덕분"이라고.
영어뿐이랴.
일본어 실력도 뛰어나다.
2007년 무렵으로 기억된다.
박진 장관이 한일의원연맹 회원 자격으로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에 정사 역으로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행사 중 하나였던 세미나가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렸는데, 2층 뒷자리에서 세미나를 지켜보던 박 장관은 뭔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세미나에서 오가는 대화 내용을 듣고 바로 적는 것이었다.
연단에서 오가는 일본어, 그것도 학술대회에서 나오는 이야기여서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알아듣고 받아 적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1년 유학한 경험이 있다지만 지금도 일본 사람들을 만나 일본어로 대화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정도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박진 장관이 이처럼 언어 감각이 뛰어난 것은 머리가 좋은 것도 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그만큼 끊임없이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영국 뉴카슬대학 교수 재직 시절, 그의 연구실에서 우연히 단어장을 목격한 일이 있다.
하버드대와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대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다.
영국 학생들이 "박진 교수는 한 가지 흠만 빼면 영국 사람들보다 영어를 잘한다"고 평가했다.
"한 가지 흠이 뭐냐"는 질문에 "미국 악센트가 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낯선 땅 영국에서 교수로 임용된 그가 콧대 높은 영국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가르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끊임없이 배우려는 노력이었다.
언어의 힘. 특히 외교에서 외국어는 큰 힘을 발휘한다.
상대의 마음을 얻고 최대의 국익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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