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 나온 예능 PD. 영화감독, 그리고 소설가. 작가 이상훈에게 붙는 수식어다. 한동안 대학에서 교편도 잡았던 그는 지금 자신의 소설을 글로벌 드라마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그와의 인연은 채널A에서 맺어졌다. 필자가 종편 출범을 앞두고 채널A에 보도본부 국제부장으로 갔을 때 그는 제작본부장으로 합류했다. KBS 공채 PD로 입사해 SBS 개국 때 자리를 옮겼고 만드는 프로그램 족족 히트 치며 성공가도를 달렸던 그였다. 6년이 채 못돼 나도 그도 그 정글 같은 곳을 떠났다.
그는 대학 교수가 되어 후진 양성에 매진했다. 연봉은 반 토막 이하로 확 줄었지만 그는 낙천적이었다. “여름방학 석 달, 겨울방학 석 달 빼면 실제 학기는 6개월밖에 안 되니 내 연봉은 실제 받는 것의 두 배인 셈이죠. 어디 그뿐인가? 학기 중에도 일주일에 강의 3개만 하면 되니 실제 하는 일에 비해 많이 받는 셈이지. 하하하” 특유의 환한 미소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는 말했다.
이상훈 작가는 지금까지 책을 13권이나 냈다. 그중 한 권은 20만 부 넘게 팔렸고 10만 부 넘게 팔린 것도 여러 권이다. 말 그대로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가 책을 처음 쓴 건 PD 시절이었다. 제목은 ‘코미디 PD의 웃음 만들기’. 자신이 만들었던 코미디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와 콩트, 방송 대본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었다. 두 번째 책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출판사 덕분이었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SBS 프로그램 ‘좋은 세상 만들기 – 고향에서 온 편지’ 마지막 부분에 넣었던 그의 글을 모아 낸 것이 생애 첫 책이었다. 그는 작가에게 전부 시키지 않고 직접 글을 쓴다. 그때도 자신의 고향을 생각하며 썼던 글을 자신이 연출한 프로그램에 넣었고 그걸 본 출판사가 책을 내자고 제안해 45편의 짤막한 글이 삽화와 함께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코미디 관련 책들을 몇 권 더 썼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간다. 그런데 2014년에 출간한 ‘한복 입은 남자’부터는 그간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파격적 장르였다. 이른바 ‘역사 미스터리 소설’.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을 혼합한 그만의 독특한 장르다.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 (A MAN IN KOREAN COSTUME)를 모티브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장영실의 유럽행이라는 궤적을 창조해냈다. 도르래 원리를 이용한 기중기, 물시계, 다연발 로켓 등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을 장영실의 행방, 그리고 서양인 최초의 한국인 그림과 연결시킬 줄이야. 작가 이상훈의 천재성이 엿보이는 스토리텔링이다. 원래 이 소설은 영화 시나리오용으로 쓰던 것이었다. 그런데 역시 출판사 인사가 소설로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던 게 소설 탄생의 배경이다. 결국 이 소설은 애플 TV에 방영될 목적으로 드라마 제작이 추진 중이다. 얼마 전 판권 계약이 이뤄졌다. 제작사는 약간의 각색에 대한 동의도 구했고 이 작가는 승낙의 사인을 했다. 조선의 천재 노비 장영실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될 날이 머지않은 셈. 그런 점에서 이상훈 작가는 국위 선양하는 애국 작가다.
역사를 토대로 한 그의 상상력은 날개를 달았다. 일본의 천황이 된 백제공주 이야기를 그린 ‘제명공주’ (2018년), 신라의 마지막 태자의 역사적 발자취를 좇아 그려낸 ‘김의 나라’(2020년), 신라 혜초 스님이 인도와 페르시아까지 여행하며 쓴 왕오천축국전과 신라 공주와 결혼한 페르시아 왕자 이야기를 다룬 이란의 설화를 모티브로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2021년)을 썼다. 한 번 붙잡으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만의 마력이 소설 속에 숨 쉬고 있다.
작가 이상훈은 단순히 상상만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거친다.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를 쓰기 위해 경주에서 6개월을 살며 신라 공주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친구인 주낙영 경주시장의 도움을 얻어 박물관 속 먼지 켜켜이 쌓인 미공개 유물까지 일일이 뒤졌다. 읽은 관련 서적만도 백 권이 넘는다. 그의 책에는 소설이지만 논문처럼 각주가 80개나 달려 있다. 책 뒤에 실린 관련 유물 사진의 다수도 그가 직접 찍은 것들이다.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표정의 소유자. 법대를 졸업했고 얼마 전 법학 박사과정 2학기까지 다녔다는 그는 법 없이도 살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책을 쓰면서 인생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한 번은 전남의 어느 고등학교 재단 이사장이 자신의 소설 600권을 한 번에 사서 졸업생들에게 일일이 선물을 해줬단다. 그 이사장은 너무나도 감명 깊게 읽은 나머지 그의 소설을 학생들에게 꼭 선물해주고 싶었다면서 출판사를 통해 이상훈 작가에게 졸업식 때 특별 강연을 요청했다. 광팬의 간곡한 부탁에 기꺼이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연이 끝나고 이사장은 감사의 표시로 봉투를 건넸지만 이 작가는 한사코 거절했다. 학생들에게 내가 쓴 책에 대해 강연하게 해 준 것 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시청률 60%라는 엄청난 기록(‘SBS 좋은 세상 만들기’)도 세웠고 당시로서는 대성공이라 할 수 있는 35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마파도)도 제작해봤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을 보자고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책을 쓰고 나서부터 자신을 보자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한다. 앞서 언급한 고등학교 재단 이사장에서부터 재벌 총수, 기업 CEO 등 평소 만나기 힘든 이들로부터 초대 받는 기회가 생겼다.
구자은 LS그룹 회장은 자신의 성북동 자택으로 이 작가를 정중하게 초대했다. 식사 대접을 하면서 미리 깨알같이 적어 놓은 질문지를 꺼내 놓고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입니까, 작가님의 상상입니까” 묻기도 했다. 융숭한 대접과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내 준 구 회장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구 회장은 ‘제명공주’와 관련해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너무나 비슷하다며 놀라움과 공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삼성 반도체의 신화를 창조했던 황창규 KT 사장은 서울 시내 한 호텔로 초청해 근사한 저녁 식사를 대접하면서 역시 소설에 관한 궁금증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예순셋 이상훈 작가. 지금도 파주 SBS 전원마을에서 밤마다 글을 쓴다. 다음 작품은 어떤 역사 미스터리에 상상력이라는 조미료를 칠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