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日총리가 한국인 위령비 앞에서 해야 할 말
-한국 대통령 일본 총리의 방문은 위령비 건립 53년만
-전쟁과 핵폭탄은 두 번 다시 있어선 안될 끔찍한 악몽
히로시마는 평화를 갈구하는 도시다.
그도 그럴 것이 원폭의 재앙을 경험한 세계 최초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그리고 사흘 후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되었다.)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낸 '원폭돔'이 당시 희생된 원혼들을 달래듯 우뚝 서 있다.
'리틀보이'(little boy)로 명명된 원폭은 히로시마를 통째로 앗아갔다.
섭씨 3천 도를 넘는 고열은 건물이란 건물은 모조리 파괴했고 사람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빼앗았다.
피부가 녹아 흐른 모습, 엿가락처럼 휘고 녹아내린 세발자전거와 도시락, 고통을 호소하는 생존자의 모습이 히로시마평화기념관에서 그날의 참상을 말해준다.
14만 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이들도 버티지 못하고 차례차례 숨을 거두었다.
그렇게 희생자는 1950년까지 20만 명으로 늘어났다.
방사능 피폭으로 고통스러운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야 했거나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2007년 취재 시점에 일본 정부의 발표로는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는 이가 26만여 명이나 될 정도였다.
생존자들은 전쟁과 핵무기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지옥 같았던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갑자기 카메라 플래시의 수백 배 되는 섬광이 비치더니 통증이 느껴지는 열기가 닥쳤어요. 너무나 무서웠지요." (다카야마 히토시, 피폭 생존자)
"원폭과 같은 모든 핵무기는 인간과 공존할 수 없는 악과 같은 존재입니다. 핵무기가 인류에게 미칠 영향을 전 세계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타구치, 피폭 생존자)
히로시마는 전쟁 희생의 상징이기도 하다.
군국주의 광기의 희생, 그런데 이따금 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이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히로시마는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원폭 투하 당시 35만 히로시마 인구 중 약 10%가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희생자도 20만 희생자 중 10%인 2만 명이나 된다.
그런데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는 히로시마 평화 공원 내 구석진 숲 속에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다.
비참한 죽음을 강요당한 영혼들을 편히 잠들게 하고 원폭의 참사를 두 번 다시 되풀이 않기를 희구하면서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본부가 1970년 세웠다. 희생된 지 25년이 지나서야 건립된 것이다.
당시 목숨을 잃은 조선인 2만 명은 학교에 보내준다거나 좋은 곳에 취직시켜 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온 근로정신대, 강제동원된 군인, 군속, 징용 피해자, 먹고살 길을 찾아 혹은 배움을 위해 스스로 일본 땅 히로시마에 왔던 이들이었다.
히로시마는 나라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그 빼앗은 나라가 일으킨 전쟁에 휘말려 이국 땅에서 3천 도의 고열에 뼈와 살이 녹아내리며 눈을 감아야 했던 한국인 희생자들의 넋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 일본 정부의 외면 속에 평화공원 한 구석에 세워진 위령비에, 한일 두 지도자가 방문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때 만나 위령비를 참배하기로 한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위령비 건립 53년 만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두 지도자는 눈을 감고 손을 모은 채 원혼들에게 진심을 전해야 한다.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들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대해 마음이 아프다”
어제 용산에서 했던 이 표현을 뛰어넘는 사죄와 반성, 용서를 구하는 진정성 있는 표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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