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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민 Jun 18. 2023

65세 산 사나이의 에베레스트 정상 도전기 2.

#2. 정상을 8백 미터 앞두고 눈물 삼킨 65세 산악인 한인석 그러나.

#2. 정상을 8백 미터 앞두고 눈물 삼킨 65세 산악인 한인석
   그러나 기네스북 등재 기록이라는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카트만두에 도착해 우선 호텔에 투숙한 뒤 안정을 취했다. 시차부터 적응해야 무리가 없기 때문에 본격 산행에 앞서 현지 적응을 위한 휴식이었다. 네팔 도착 이틀째 호텔에서 쉬면서 정상 공략을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는데 몰두했다.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한 공식 수속을 밟고 장비를 점검했다. 나흘째 루카라로 이동했다. 헬기로 45분 거리였다. 


루카라는 해발 2860미터로, 베이스캠프로 가는 히말라야의 관문이었다. 거기서부터 본격적인 적응 훈련이 시작된다. 엿새간 파크딩(Phakding)을 비롯한 주변의 트레킹 코스(Namche, engboche, Dingboche, Lobuche 등)를 하루 예닐곱 시간씩 오르고 내렸다. 3~4천 미터에 이르는 곳으로 고소에 적응하는 훈련이었다. 그렇게 기본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11일째 되던 4월 16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도착. 해발 5,343미터였다.


"이제 본격 등반이다!" 가슴 벅찬 도전을 앞두고 몸 상태와 에베레스트의 기상 조건 등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몸이 좀 으스스하고 축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한 그였지만 오래간만에 이국 땅을 밟아서 그런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가슴 한 켠에서는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날 밤 열이 슬슬 오르더니 목구멍에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코로나였다. 베이스캠프에 상주하는 의사로부터 코로나 확진을 받고 당장의 도전은 접어야 했다. 곧바로 헬기를 타고 카트만두로 이동, 격리에 들어갔다. "정상이 바로 저기인데" 아쉬움 속에 한 총장은 코로나 치료제로 버텼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한국에서 가져갔던 치료제를 먹자 통증도 가시고 가래도 줄었다. 기침도 줄었다. 바이러스가 몸 밖으로 다 빠져나간 듯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다시 루카라로 가는 헬기에 몸을 실었다. 거기서 하루 밤을 보내고 다시 헬기 편으로 베이스캠프로 이동했다. 4월 26일이었다. 







베이스캠프에 다시 도착한 이후부터는 코로나 후유증이 괴롭혔다. 다 나았나 싶었는데,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밥맛도 없었다. 기침이 심해질수록 코로나로 인한 후유증으로 등반이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잠을 설치고 매일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래도 버텨야 했다. 그를 믿고 응원해 준 여러 후원자들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체력을 회복해 등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뭐든 먹어야 했다. 입맛이 없어 괴로웠지만 억지로 음식을 먹어가며 코로나를 이겨나가고 있었다. 


"입맛이 없는데 먹으려니 먹는 것이 고통이더군요. "외국 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운 적이 없는데, 이번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코로나에 걸려 서러움과 힘듦,  등반에 대한 열정으로 매일 울었습니다" 


후유증의 고통을 이겨내며 베이스캠프에서 고소 적응을 위해 캠프1과 캠프2, 캠프3를 차례로 올랐다. 산소통을 매지 않은 채  해발 6,800미터까지 오른 무산소 등반이었다. 코로나 확진 이후 고소 적응 산행으로 8일을 고산을 오르고 내렸다. 캠프3까지 고소 적응 훈련 산행을 마치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건 5월 7일.







이튿날 헬리콥터를 타고 정상 등정을 위한 체력 회복과 기상 평가를 위해 루카라로 향했다. 진짜 정상 공략을 위해서는 체력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닷새 동안 잘 먹고 쉬면서 체력을 다졌다.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하얗게 눈 덮인 에베레스트 정상이 보였다. 그리고 정상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용기를 다지며 꿈을 불태웠다.


닷새간 쉬며 의지를 확인하고 5월 13일 베이스캠프로 이동했다. 5,364m의 베이스캠프에서 다시 나흘을 쉬고나서야 비로소 진짜 도전이 시작되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등반이다" 한 총장은 굳게 마음먹고 아이젠이 장착된 등산화를 앞으로 내밀었다.


5월 17일 캠프2에 도착, 다시 나흘을 쉬고 21일 오전 8시 출발, 6시간 뒤인 오후 2시 캠프3에 도착했다. 텐트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인 22일 오전 8시 다시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오후 4시 반 정상으로 가는 마지막 캠프인 캠프4가 눈앞에 나타났다. 정상이 눈앞에서 어서 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몬순 시즌을 앞두고 폭설이 쏟아졌다. 30cm는 족히 내린 듯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악조건이 펼쳐졌다. 캠프4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발견되었다. 항상 비축되어 있어야 할 산소통이 캠프4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앞서 도전에 나섰던 다른 등반대원들이 모두 사용해 버린 것이었다.


캠프3까지는 무산소 등반이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캠프4부터 정상까지는 산소통 없이는 무리였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과 폐가 견딜 수 없는 고도였다. 약 8백 미터 남기고 난감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무리해서라도 무산소 등반에 도전할까"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정상 공략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는 컨디션이 아주 좋고 의지도 충만한 데다 셀파들도 등정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날 캠프4에 함께 올랐던 인도팀도 난감한 상황을 마주하고는 정상 공략을 머뭇거렸다. 셀파들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소통 없이, 수북이 쌓인 폭설을 뚫고 오르는 건 자살행위라며 만류했다. 의사결정은 이럴 때 가장 중요하다. 결국은 결과가 모든 걸 말해줄 것이다. 한 총장은 눈물을 머금었다. "이제 8백 미터만 오르면 되는데, 물러서야 하다니..." 분루를 삼키며 인도팀과 함께 하산을 결정했다.


그런데 산소통은 왜 소진되었을까?


"제가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시즌 마지막 등반대원으로 올라가게 되었거든요. 게다가 올라간 당일에 눈이 많이 내려서 도저히 정상 공략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하루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즈음에 마지막 캠프인 캠프4에 응급환자와 사망자 수습을 위한 구조대가 투입되면서 여유 산소통이 모두 소진됐던 겁니다. 산소통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인도팀과 함께 하산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묻어났다. 한 총장은 그의 셀파 중 한 명을 구조팀을 도와서 말레이시아인 구조에 힘쓸 수 있도록 했다. 다행하게도 말레이시아 등반대원은 무사히 구조되었고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다.


정상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의 캠프4에는 항상 여유분의 산소통이 쌓여 있는 게 원칙이다. 날씨가 안 좋으면 등반대원들이 며칠씩 캠프4에 머물러야 하고 사고라도 나면 응급환자와 구조대를 위한 산소통이 충분히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하면 셀파들이 수시로 산소통을 운반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의 팀이 마지막 등반 팀이었던 데다, 마침 그즈음 사고가 발생해 구조대와 응급환자들이 산소통을 다 쓰는 바람에 차질이 빚어졌던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산 길에 오른 한 총장. 수십 년간 꿈꿔왔던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그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이 하산 길에 찾아왔다. 기네스북에 등재될 수 있는 기록을 세웠던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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