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노 히데오의 연인 나가타 노리코는 보기 드물게 예쁜 몸을 가진 여인이었다. 키가 170cm로 훤칠한 데다 날씬한 다리와 잘록한 허리를 지녔다. 가슴과 골반이 S라인 곡선을 잘 갖추어 어느 사내라도 한 번 그녀를 쳐다보면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의 몸매를 가졌다. 노리코는 하지만 사내들의 그런 시선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늘 펑퍼짐한 바지에 한 사이즈 큰 티셔츠, 유니섹스 점퍼 차림을 즐겼다. 군중 사이에서 도드라져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늘 애를 썼다. 하지만 헤어스타일만큼은 신경 썼다. 허리 가까이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약간의 웨이브를 준 펌 헤어를 유지했고 진한 갈색으로 물들여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나가노와 노리코는 동경대 사진 동아리 선후배 사이로 만났다. 두 사람이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된 건 동아리 회원들이 가와구치 호수로 출사를 나갔을 때였다.
"나가노 선배, 선배는 왜 맨날 후지산만 찍어요?"
"글쎄, 후지산의 늘 변함없는 늠름함이 좋아서랄까. 후지산은 언제 어디서 보든 항상 장엄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서있거든"
"난 잘 모르겠는데"
"후지산에 올라가 본 적 있나?"
"아니요. 고고메까지 밖에요"
(고고메: 버스나 승용차로 갈 수 있는 후지산 중턱으로 거기서부터 등산이 시작된다)
"나는 후지산을 오를 때마다 내가 일본인이라는 자각이 더 강해져. 마치 산이 내게 말을 거는 듯한 환청이 들리곤 하거든"
"후지산이 말을 걸어요? 하하"
노리코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지만 심각한 표정의 나가노를 보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높이 3776미터, 백두산(2744미터)보다 천 미터 이상 높은 산이야. 일본 최고의 명산이고 우리 일본 민족의 얼이 서린 곳이라고 할까, 언젠가 다시 꿈틀거리며 폭발할지도 모를 에너지를 품고 있는 산이어서 더 매력적이지"
"선배는 민족주의자인가 봐요"
"지금 우리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한 때는 아시아를 지배했고 중국은 물론 러시아와도 싸워 이겼고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전쟁을 벌였던 강대국이었다고. 그런데 한국이 일본인들의 혼을 다 빼놓고 민족정신을 말살하다시피 해서 과거의 전성시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작금의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어. 그럴 때마다 후지산에 올라 그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고 있을 용암의 기운, 에너지를 느끼면서 나는 내가 일본인이라는 걸 내 가슴에 새기곤 하거든"
한 번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본 일 없던 노리코는 나가노가 읊어대는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이 사람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네" 노리코는 속으로 생각했다.
"노리코는 일본 사람이라는 게 자랑스럽지 않아?"
하늘에서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나가노가 물었다.
"... 글쎄요.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서.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출신이 일본이든 한국이든 상관없잖아요. 지금 대한민국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이나 문화 영향력으로 보나 세계 5~6위 국가의 위상을 갖고 있으니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족하고 있죠"
"민족의 뿌리를 잃어버릴 정도로 총독부의 세뇌공작이 심각했던 거야. 놈들이 일본인들의 혼마저 다 빼버렸다고"
노리코는 나가노의 이야기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큰 사람이 될 거란 생각으로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서서히 그에게 묘한 끌림을 느꼈다.
"선배, 선배는 나중에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어요?"
"무슨 일을 하든 일본이 하루속히 독립을 되찾는 것에 도움이 되는 일이어야 하겠지. 내가 만일 일본의 식민지가 고착화되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게 된다면 '셉뿌쿠' (할복)를 할 거야"
"무서워요"
노리코는 자신도 모르게 나가노의 품 안에 몸을 던지며 움츠렸다.
"이 배를 가른다고요? 그러지 말아요"
노리코는 나가노의 배를 어루만졌다.
"나가노는 오른 팔로 품에 들어온 노리코를 지긋이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손을 노리코의 이마에 얹었다.
"내가 상처 입은 노리코의 혼을 치유해주지"
오른손으로 노리코의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왼손으로는 노리코의 왼쪽 볼을 어루만졌다. 후지산이 바라다 보이는 가와구치 호수의 하늘엔 유난히 밝은 별들이 쏟아질 듯 춤추고 있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다들 숙소로 돌아간 뒤여서 두 사람 만의 공간이었다. 그 어둠 그 별빛 아래서 가볍게 밀착한 나가노와 노리코의 몸은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눈을 꼭 감고 입을 맞췄다. 노리코의 왼쪽 뺨을 어루만지던 나가노의 왼손은 노리코의 목선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터질 듯한 오른쪽 가슴이 나가노의 손끝에 짜릿하게 느껴졌다. 노리코의 왼손은 나가노의 허리를 감쌌고 나가노의 배를 어루만지던 그녀의 오른손이 무릎으로 옮겨지더니 사타구니로 향했다. 차가운 밤공기가 두 사람을 휘감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날 밤 후지산 자락 별빛 아래서 연인이 탄생했고 사랑이 시작했다.
스가모 감옥에 면회를 온 노리코의 모습은 그날 밤처럼 아름답고 섹시했다. 평상시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거의 팬티가 보일 듯 말 듯 짧고, 애플힙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는 미니스커트에 검은 망사 스타킹, 12cm나 되는 하이힐을 신었으니 안 그래도 긴 다리가 훨씬 길어 보였다. 흰색 씨쓰루 블라우스 속으로는 핑크빛 브래지어가 훤히 비치고 보일락 말락 풍만한 가슴골이 드러나는 옷차림이 간수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노리코를 만나게 해 달라는 나가노 유키오의 요청을 이감응이 들어줬던 것은 나가노가 곧 총독부 내무대신을 맡아달라는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걸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나가타 노리코가 스가모 형무소 특별 면회소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나가노 유키오가 그녀의 섹시한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선배, 놀란 표정 짓지 마"
노리코가 간수가 듣지 못하도록 낮은 목소리로 나가노에게 말했다.
"잠시 후에 구출작전이 개시될 거야. 곧 여기를 나가게 될 거라고. 선배는 일본 독립운동 지도자니까"
그리고는 가슴속 브래지에서 뭔가를 꺼내 손에 움켜쥐고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나가노의 두 손을 잡는다.
"이걸 간수 모르게 입에 삼켜"
노리코의 속삭임에 나가노가 눈으로 답한다.
"으악!" 돌연 노리코가 비명을 지르더니 간수를 향해 외친다.
"이봐요. 구급차를 불러줘요. 이 사람이 위험해요"
간수가 면회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나가노가 쓰러진 채 입에 거품을 물고 떨고 있다.
"이 사람, 간질이 도진 것 같아요. 3년 전에 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빨리 응급치료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고요"
나가노가 간질 증세를 보인 건 노리코가 건넨 약 때문이었다.
워낙 사실 같은 증세를 보인지라 놀란 간수들이 119에 전화했고 형무소장이 달려왔다.
"이 사람이 내무 대신을 수락했다는데, 이 교도소에서 관리를 못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당신이 책임져야 할 거예요. 어서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뭐 하는 거예요?"
노리코의 고함 소리에 놀란 형무소장이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라고 부하직원에게 지시한다.
간수 두 명이 곧바로 들것을 가져와 거품을 물며 사시나무 떨 듯 떠는 나가노를 데리고 나간다. 형무소 정문 안쪽에는 이미 구급차가 도착해 있다. 노리코는 나가노와 함께 구급차 뒷칸에 타고 요란한 "삐요 삐요"소리와 함께 스가모 형무소 정문을 빠져나간다.
나가노의 탈옥 작전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나가노와 노리코가 탄 구급차는 노리코의 요청으로 일본 독립단이 사전에 준비했던 것. 간수가 전화했던 119 전화도 도청하던 독립단원이 119인 것처럼 인터셉트해 받았던 것이다.
나가노와 노리코를 태운 구급차는 일본 독립단 비밀 아지트가 있는 요코하마로 유유히 내달렸다. 일본 야쿠자 오야붕 야마구치 히데오가 기다리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