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지방(紙榜)
유시민처럼 글쓰기-1일 차
<어떻게 살 것인가> P.30
-필사-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제사를 지내러 큰집에 가면 어른들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조상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늘 제사를 모신 할아버지는 이런 벼슬을 하셨고, 외가는 어떠했으며, 처가는 누구의 후손이다. 뭐 그런, 끝도 없이 가치를 쳐나가는 옛날이야기였다. ‘가문의 영광’에 대한 강의가 끝나면 어른들은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모범답안은 판사나 검사였다. 그와 다른 대답은 어른들을 실망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판사가 되겠다는 모범 답안을 말하곤 했다. 어른들은 매우 기꺼워하셨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바꿔 쓰기-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집안의 큰 제삿날, 어렸을 때는 온 가족이 아버지 차를 타고 대여섯 시간을 달려 경북 안동까지 가곤 했다. 할아버지네 들어서면 오랜만에 뵙는 재종조부, 사촌의 사촌 가족까지 다 모여 큰 집이 시끌벅적했다.
할아버지와 큰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사촌 할아버지는 우리 고만고만한 사촌들을 모아놓고 가문에서 이름난 조상님들을 읊어주셨다. 오늘 제사를 모신 할아버지는 조선시대에 이런 벼슬을 하셨고, 외가는 누구 임금의 처가였고, 지금으로 치면 어떤 자리, 공무원 몇 급 몇 급.. 뭐 그런 끝도 없이 가지를 쳐나가는 옛날이야기였는데 10살 남짓한 꼬맹이가 복잡한 촌수와 급수를 이해했을 리가 없다.
할아버지들은 ‘가문의 영광’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시고서는 우리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으셨다. 그때 내가 아는 세계에서 최고 높은 사람은 미국 대통령이었는데 나는 한국인이니까 안 될 것 같고 우리 가문이 대통령급은 아니란 것은 알았다. 그래서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에 큰 삼촌네 첫째 사촌 형이 자신은 판사, 둘째 사촌형은 검사라고 했다. 할아버지들이 “그래그래” 하며 흡족해하셨다. 작은 삼촌네 사촌형은 ‘화가’가 되겠다고 하자 “그거 밥 굶는 걸 왜 하려고 하니? 자고로 남자는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게 최고다” 하셨다. 나는 마음이 달아 내가 큰 사촌형한테 ‘형, 판사랑 검사가 뭐야?’라고 물으려고 했는데, 화가라는 말에 마음이 상하셨는지 다행히 나한테까지 차례가 오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들은 아실까? 2022년 김환기 화백의 그림은 132억 원에 팔렸다. 그리고 박서보 화백은 90이 넘어 암 진단을 받은 지금도 매일 자신의 영혼을 그린다. 할아버지가 큰 삼촌네 사촌형들한테 어떤 판검사가 되고 싶냐고 물어봤다면 “훌륭한 판검사가 되고 싶어요”로 끝났겠지만, 작은 사촌형한테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를 물어봤다면 아마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 얘기했을 것이다.
-단상 쓰기-
제사가 그렇게 중요한 집이라면 집안사람 모두가 자서전을 쓰게 했으면 좋겠다. 지방(紙榜) 대신 쓸 수 있는 소박한 제사용 자기소개서 한 편 씩이라도.현대의 고소득자인 변호사와 의사도 미래 AI가 장악한 세상에서는 다 로봇의 일 아닌가? 벌써 미국에서는 Chat GPT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고 한다. 직업이 그 사람의 사회적 등급을 나타내는 시대는 곧 끝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음세대에서는 나를 직업이나 호칭으로 기억해주지 말았으면 한다. 아, 내가 나중에 대부호가 된다면 연봉으로 기억해 주는 건 괜찮겠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미지수. 내가 언제 죽더라도 나를 기억해 줄 수 있는 일은 내가 얼마를 살았던 사는 동안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았고, 그게 어떤 행동과 성과로 나타났었는지 하는 것들이다. 내가 가진 용기, 사랑, 그 용기와 사랑을 전해받은 사람들이 전하는 나와의 추억으로 나라는 사람을 오래오래 기억해 주면 좋겠다. 그러면 제사에 일가친척말고 더 많은 이들이 기꺼이 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