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은 독서
(4/11, 화) 유시민처럼 글쓰기 8일 차(726) / <나의 한국현대사>(돌베개, 2014)(p.17-18)
*글 분석 포인트
1. 저자의 출신성분에 대해 설명하는 단락이다.
2. 도시 프티부르주아(소자산계급) 혹은 소시민 가정에서 자랐다.
3. 그것을 풀어내는 멋진 한 문장! “‘출신성분’은 의미 있는 정보를 담고 있다.”
4. 다음 문장들은 정보를 풀어내고 있다.
5. 가정환경의 영향으로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중학교 역사교사로 밥상머리 교육을 시켰다.
6. 필자는 자신을 자유주의자라 말한다. 자유주의자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사람이다.
*필사하기
사회학 전문용어를 빌리면 나는 도시 프티-부르주아(소-자산계급) 출신이다. 일상 언어로는 소시민 가정에서 자랐다. ‘출신성분’은 의미 있는 정보를 담고 있다. 사람은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격과 개성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뚜렷한 자유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소자산계급의 문화적 특성으로 알려져 있다. 어릴 적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에게 이순신, 김유신, 궁예, 항우, 악비, 장자방, 제갈공명, 나폴레옹 등 뛰어난 역사 인물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걸출한 개인을 흠모하는 성향이 있다.
스스로 계획을 세워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좋아한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 남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것도 왠지 편하지 않다. 돈이나 권력보다는 지성과 지식을 가진 이를 우러러보며 내가 남을 부당하게 해치지 않는 한, 사회든 국가든 그 누구든 내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바꿔 쓰기
나는 소시민 가정에서 자랐다. 사회학 전문용어로는 도시 프티-부르주아(소-자산계급) 출신이다. ‘출신성분’으로 개인에 대한 의미 있는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사람은 가정환경의 영향 속에서 인격과 개성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뚜렷한 자유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소자산계급의 문화적 특성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이순신, 김유신, 궁예, 항우, 악비, 장자방, 제갈공명, 나폴레옹 등 뛰어난 역사 인물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늘 그런 인물을 떠올리다 보니 나는 걸출한 개인을 흠모하는 성향이 있다.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잘 맞는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일, 남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자리도 그다지 편하지 않다. 돈이나 권력보다 지성과 지식을 가진 사람을 우러러보게 된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경제적 문학적 자산을 펼칠 수 있도록, 내가 남을 부당하게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든 국가든 그 누구든 내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단상 쓰기
나는 고등학교 시절 야자시간에 몰래 소설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장마철 비가 많이 오는 밤, 천둥 번개가 치는 밤에는 도저히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소리에 민감하다), 야자 당번 선생님들이 창문너머 감시할 때 언뜻 공부하는 것처럼 보일만한 낡은 소설책을 읽었다. 그렇게 몇 번의 장마철과 봄방학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 해치운 장편 소설은 조정래 <태백산맥> <아리랑>, 박경리 <토지>,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어디로 갔을까> <두부> 등, 그때만 해도 호호 할머니로 살아계셨던 한국 문학계 거장들의 글이다. 그리고 수능을 망쳐 아무 연고 없는 전공을 택하고나서는 근처 대학교에 출강하던 진중권 교수의 교양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하루는 수업마치고 역으로 가는 교수님을 쫓아가 인사드렸더니 같이 서울행전철 타고 가는 내내 수다를 떠는 영광을 얻고서 그 후 그분의 미학 강의와 책을 다 찾아 읽었다.
스무 살 중반 입사한 첫 회사에서 대표님이 가끔 나눠주시던 책 중에 유시민 작가의 <글쓰기 특강>을 얻어 읽었다. 그 책에서 추천한 책들을 10년 동안 천천히 읽으며 살고 있다. <자유론> 같이 단숨에 읽으며 이마를 몇 번이나 때린 책이 있는가 하면, 에리히 프롬의 <소유나 삶이냐>는 읽는 데에 장장 3년이 걸렸는데 3년째 되던 해 작년에 아주 시의적절한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남자 친구와 이별하고 관계의 패배감에 젖어있을 때 저자의 또 다른 책인 <사랑의 기술>을 연달아 읽게 했으니 말이다. 고등학교시절 과학선생님이 문고리만 잡아도 잠이 오던 천생 문과생이었던 나에게 파인만의 <물리> 책은 장벽이 높았다. 그러나 초등학생 버전의 쉬운 책을 읽고 나니 책 <보이는 것이 실재가 아니다>, 영화 <커넥트>와 같이 물리적인 시공간에서 상대와 내가 공유하는 - 보이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존재를 감지하게 되었다. 이 책들이 준 감명은 나의 의식과 함께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내 의식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감미롭고 경외롭다.
나의 출신 계급? 글쎄. 아직도 가끔 고향이 어딘지, 부모님 성씨에 무슨 일을 하셨냐 까지 묻는 어르신을 만난다. 나는 평소 어른들 말에 맞장구를 잘 쳐드려서 그때도 역시 기쁘셨는지(어른들은 말을 잘 들어주면 말을 잘 한다고 생각하신다) ‘이런 똑똑한 아가씨는 어디 집 규수 일꼬’ 하는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호구조사를 시작하셨으나. 송구하게도 내세울 게 하나도 없네. 충청북도 어느 복숭아밭 옆의 초등학교를 다녔고, 어머니 아버지는 육체노동을 하셨고, 나도 어쨌든 전문대학을 다니다 말아서, 얼마 전 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하기 전까지는 내 학문의 분야를 말하기도 어려웠다. 스스로도 제대로 배운 게 없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갑오개혁 이후 신분계급이 사라진 사회에서,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대학도, 기업에도 다니지 않는 지금의 나는 나의 자산, 즉 ‘지성과 지식’적 배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늘 단상 쓰기를 해보니 이제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추천하는 책을 읽으며 산다고 말해야겠다. 책이 시공간을 초월해 저자를 나와 연결해주었고, 그들의 높은 식견을 빌려와 내 삶을 비춰보며 자유를 얻었다고. 가난한 사고와 표현에서 허들을 걷어내고 몸을 뻗어 넘어보는 자유. 그래서 천천히 계속해서 읽어나가고 싶다고. 가뿐한 마음으로 쭉쭉 뻗어 우주까지 연결될 수 있도록, 고전의 최강자라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