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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Jun 09. 2018

10. 엄마의 사이즈


왜 나는 엄마에게 계속 빚지는 마음이 드는지.

엄마는 계속 고단하도록 집에 놔두고 나만 나와서 행복해서 그런 걸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서 이 빚으로부터 해방될까?

지금 나미비아는 저녁 8시. 한국은 새벽 4시다. 

엄마가 곧 일어날 시간이다.


여기 밤은 8시만 넘어도 은하수로 뒤덮인다.

이 은하수를 엄마에게도 보여주고 싶지만 엄마에게는 이미 열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엄마에게 중요한 건 먼 곳을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은하수를 보는 것인가? 난 분명히 엄마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가까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떨어져 있고 보니 엄마가 나에게 한 사람의 존재로 다가온다. 세상에 나와서 차근차근 만나온 사람들처럼, '나'와 '너'가 되어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처럼. 

그중에서도 내가 내 것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항상 걱정하고 위로하고 떠올리면 슬퍼지는 단 한 사람.


이전에 꽤 오랜 기간 혼자 살았을 때, 엄마와 삼사일에 한 번씩 전화할 때, 이 삼주에 한번 만나서 밥이나 겨우 먹을 때. 그때는 나 어떻게 살은 걸까 대체?

아빠의 사이즈처럼 엄마의 삶도 나는 관찰할 필요가 있다. 아빠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왜 저런 모양이 만들어진 걸까 추리하고 파헤치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들여다보게 됐었는데, 엄마는 사실 너무 가까워서 관찰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었다. 나랑 닮은 구석이 너무 많이 때문에.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엄마를, 엄마도 나를. 그런데 이렇게 멀리 떨어지고 나서 보니 그러고 싶다. 엄마를 그리고 싶다, 새 하얀 도화지에 처음부터.


엄마의 손마디가 굵어진 이유

맑은 눈에 백내장이 생긴 이유

엄마의 눈이 꺼지고 볼살이 쳐진 이유

본인이 마흔을 넘기기 전에 죽을 거라고 생각한 이유

생이 불행해진 이유들을 알지만 다시 알고 싶다. 그 이유들을 나는 기록해야 한다.


우울은 빚과 같다. 오랜 시간 억울한 일을 당하면 시간은 그 값으로 우울을 준다. 

억울한 일에 내 에너지를 쓰고, 시간을 쓰고, 생명을 깎아 쓰고 나면 시간은 그 값으로 우울을 쳐준다. 

우울은 평소에는 빚쟁이처럼 숨어있다가 내가 억울함을 다 갚고 조금이라도 행복을 벌라 치면 불쑥 나타나 손에 쥔 것을 채간다. 한번 우울에게 빚을 지면 헤어 나오기 쉽지 않다. 내가 버는 돈과 에너지는 모두 우울을 덮기 위해 쓴다. 빚의 이자만을 겨우 갚는다.


엄마는 나보다 두 곱절도 넘는 억울한 시간을 보냈고 배가 넘는 대가를 받았다.

본인은 항상 나중이고 그 희생이 다른 이에게 봉사하는 거라고 생각하던 버릇이 이제는 본인을 종노릇 하게 만들었다. 숭고한 희생이 고작 시중이나 드는 일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종을 위해 눈물 흘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매일 스스로를 위해 울었다.


엄마의 우울증이 심해졌을 때 다행히 나는 내 우울을 거의 덮어갈 무렵이었다. 나는 남들처럼 잘 되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만성적으로 해왔다는 것을 깨달을 무렵이었다. 잘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일단은 내가 원하는 것, 나에게 보탬되는 것을 선택하는 버릇을 들이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선배 노릇을 하면서 이기적인 생각을 많이 하도록 가르쳤다.

내가 우선이야. 내가 좋아야 돼. 내가 건강해야 돼. 내가 즐거워야 돼. 내가 안 힘들어야 돼. 

'우선은 내가 ~'로 시작하는 말들을 매일 밤 합창했다. 거실에 이불을 덮고 쪼그려 앉아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엄마는 차츰 모든 고민에 있어서 연습한 말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오늘 저녁을 언제 할지 시곗바늘을 계산할 때도, 서점에서 책을 들었다 놨다 할 때도, 마트에서 생선코너를 지날 때도, 꽃집 앞을 지날 때도, 다이소에서 꽃 바구니를 살 때에도.


이렇게 우리 둘의 말이 쌓여서 생긴

엄마의 말의 깃대. 생각의 깃대.

감사하고, 응원하고, 후회하고 곧바로 다짐하는 날들의 깃대.

한 여자 안에 그런 깃대들이 생겨서 이제는 보통의 생각을 그 깃대를 향해 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런 여정을 기록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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