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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Sep 23. 2022

역마살의 의사결정 (상)

말띠

나는 90년생 말띠다. 라고 소개하면 어른들은 ‘아이고~ 여자가 말띠라니 승질 한 따까리 하겠네’ 한다. 그러면 나는 ‘그냥 말띠인 줄 아세요? 무려 백.말.띠.예요’ 라고 대꾸한다.


말은 사람에게 잘 길들여지는 가축이고, 무리 생활에서 안정감을 얻고, 달리기 위해 태어난 온몸의 근육이 멋있고, 얼굴이 길지만 눈이 크고 멋있고 하여튼 다 멋있는데, 사주팔자에서는 ‘말띠’ 첫 줄에 자유분방하고 이기적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그건 생물 고유의 성질일 뿐, 말은 용이나 호랑이처럼 거대하고 상징적인 동물도 아니고 쥐나 뱀처럼 산에 숨어사는 작은 동물도 아니며 오히려 사람이 먹이 주고 기르는 ‘가축’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게다가 12 지신 중에 말만큼 다양한 쓰임을 하는 가축이 있을까?  


"조선시대 국가 경제 운용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자 재화는 말, 소 였습니다. 말은 생산목장에 따라 국가 목장에서 생산하는 관마(官馬 )또는 국마(國馬)가 있었고, 민간목장에서 사육된 사마(私馬)가 있었습니다. 관마는 그 쓰임새에 따라 군사용인 전마(戰馬), 교통용인 역마(驛馬)·파발마(擺撥馬), 물품 운반용인 태마(馱馬)·만마(輓馬), 농경용인 농마(農馬), 무역용인 교역마(交易馬) 등으로 나뉘었고, 중국에 사절을 파견할 때 가지고 간 진헌마(進獻馬)로도 활용되었습니다."

(출처) http://www.farminsight.net


나만해도 무리 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얼굴은 길지만), 내 친구 중에는 남 상처받을까 할 말 못 하고 속병 나는 배려심 많은 친구도 있는 걸 보면 아마 우리는 말이라는 사주 유전자만 같지 사회적 역할은 다 다르게 길러진 것 같다. 나는 이 중에서 아마 역마로 자라난 것 아닐까 싶다.


아빠는 49년생 소띠인데 전쟁 중에 태어나서 사주가 다 엎어졌는지 한 곳에 정착을 못하고 숱하게 이사를 다녔다. 아빠를 따라 가족 모두가 2-3년에 한 번씩 짐을 쌌다 풀었다, 어떤 때는 2년 전 쌌던 짐을 그대로 이삿짐차에 싣기도 했다. 아빠의 ‘이 집 팔았다’하는 말이 정말 죽도록 싫었는데 스물두 살에 상경해 혼자 나와 살면서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셋집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편입학원, 회사, 전세사기, 친구와 같이, 그러다가 역마살의 끝판왕인 아프리카 대륙 종주 배낭여행까지. 다녀와서도 무려 세 번을 더. 이쯤 되면 이제 아빠 탓을 할 수 없지 않나? 이번 이사를 겪으며 나의 반복되는 결정 패턴이 있다고 깨달았다. 무의식적인 패턴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게 내 일상을 허무는 일라면 더욱 더.



어른들이 말하는 역마살, 부정할 수 없이 내 얘기가 맞다.

그럼 역마 운명의 사람들은 어떤 성향이고, 어떤 경로로 ‘떠난다’는 결정을 할까?

왜 떠나기로 마음먹는지 생각해봤다 : 너무 많이 (여러 번, 오랜 기간을) 참다가 결국엔 포기하고 떠난다.


[1] 그럼 왜 참는가? 참을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1. 난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난 아프리카도 다녀왔는걸. 별거 아냐. -라고 매일 밤 생각하다가 한번 와르르 무너졌었다. 내가 힘드니까 ‘힘들다’ 생각이 드는 건데 ‘힘들구나, 어떻게 하면 좀 덜 힘들까?’ 방법을 생각해보는 게 아니라 ‘아니, 난 힘든 거 아냐’하고 내 상태를 무시하기 때문에 상황을 개선하지 못한다.


2. 난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 앞집에서 말도  되는 짓을 하는 애들이 외국인이라서, 남자가 있어서,  여자 혼자 사니까. : 감히 똑똑 두드려서 따지지 못하겠더라.

- 저렴한 집이라 거주환경이 좋지 않으니 이런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연민에 빠지면 스스로 주눅이 들어서 내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 못하는 걸까? 내가 막 돈이 없어서 겨우겨우 이 집에 들어온 게 아닌데, 내가 왜 그렇게 불쌍했지? 너무 좁은 집에 살면서 하나 둘 포기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 과정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나 보다.



[2] 내 것을 지키기보다 (참다가) 결국엔 떠나기로 결정하는 이유


3. 내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뭔지, ‘  어떻게 지키는지  모르겠다. 방에  없는 척하려고 지금 밖에 빼놓은  짐들. 내가 잘못하고   맞지? 아무도   계단  구석에 소중한 것을 두지 않을 거야. 소중한 것보다 급한 것을 먼저 하다 보면  것은 언제나 찬밥 신세가 된다.


4.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 나의 ‘것’이라는 게 뭘까?

4-1. ‘이건 잠깐 쓰고 마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림 그리는 시간,  행위만  거라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배낭여행은 돈을 내고 물건이 아니라 시간을 사는 행위였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물건이 생겨도 가방에  들어가면 사양했다. 배낭이  집이라 분수에  맞게 집이 크면 곧바로 힘들어졌으니까. 그래서 부피가 없는 경험만 많이 쌓는 것이 내게 제일 가치 있는 일이었다.

삶도 마찬가지.  년을 모은 목돈을  번에 날리고나니까 의 실체가 잘 안느껴진다. 물건은 그냥  필요에 따라  곁에 있다 없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좁은 집에 살면 물건을  구석에 꽁꽁 숨겨두고 꺼내기 번거로워서 일을  벌리게 된다. 꺼내놓고 수시로 쓰는  적을  실제로 물건이 없는  아닌데, 나는  물건들을 파악하지도 제대로 쓰지도 못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예쁘고 맘에 드는 것을 고르고 골라서 사기보다 그냥 필요에 맞으면 저렴한 걸로 사는 습관이 생겼다. 어차피 오래   아니니까.  물건에 애정도 책임도 없으니까 ‘나의것이 되지 않지.


4-1. ‘금방 있다 떠날 건데 뭐’ 나는 여기 소속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회사를 다닌 지 오래돼서 그런 걸 지도 몰라. 첫 회사였던 IT회사는 어쩌다 흘러들어 간 곳이라 ‘내가 왜 여기에 있지’라고 늘 생각했고, 관광객 없는 관광안내소에서 일할 때는 ‘얼른 나가서 가이드가 되어야지’ 생각뿐이었다. 학교 동기나 프로젝트 모임도 성향이 안 맞는 것 같으면 애써 뭉치려 하지 않고 그냥 혼자 다닌다. 어쩌면 가족도 남친도 친구도 물론 지금은 소중하지만 내게 피해를 끼친다면 언제든 관계를 그만두고 떠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차피 오래된 친구들이랑은 갑자기 관계가 변할 일이 없고 오히려 남친이 새로운 관계니까.

 일이  것도 아닌데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하지?’

회사에서 멍하니 모니터를 보다가 문득, 부장님들의 담배냄새나는 침방울 맞아가며 공해같은 말을 듣고있을 때 문득, 이 생각이 시도때도없이 몰려왔다. ‘내 거냐 아니냐’로 저울질한다는 거 자체가 어쩌면 ‘내 거’, 내 소유를 강하게 인식하던 거 아닐까. 또 은연중에 내 것이 ‘시간과 에너지’라는 것도 인식했던 것 같다.

일과 생활을 적당히 길들여서 데리고 살면 좋았겠지만 회사는 언제나  전부를 원하지 나의 적당한 에너지와 시간에 만족하지 않는다. (좋게 말해) 보수적인 회사에서 너무 일찍 회사생활을 시작해서 그랬나, 3   버티다가 끝내 길들여지지 않고 결국 아프리카로 도망가버린 내가 조금 이해가 된다.


이제 코로나 팬데믹도 끝나가고, 나도 3년간의 은둔생활을 끝내고 고수가 되어 다시 강호에 나갈 준비를 한다.  ‘  목록이 필요할 때가 온다. 싫다고 자꾸 떠나지 말고 내게 필요한 거라면  길들여서  걸로 만들어야겠다. 내가  갖고 있는지 알아야 주눅 들지 않고 동료와 고객과 사장과 떳떳하게 밀당을   있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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