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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Oct 03. 2022

<Lady Bird>

자뻑과 영수증

“다른 이들이 쌓아준 기적 위에 내가 있다”

아프리카 여행 시절 한국에서 해결 못했던 대출 문제 때문에 이집트에서 모든 걸 접고 급히 한국으로 돌아갈 뻔했다. 결국엔 엄마와 옛 직장동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해결해서 여기 눈부신 나일강에 내일도 모레도 더 올 수 있겠다 안도했을 때,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바로 다른 이들이 쌓아준 기적임을. 지금의 평범하고 별일 없는 나날이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쌓아준 기적임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내가 말이야! 이만큼! 했다!”

하루정도 자뻑에 취하고 나면 누가 슬쩍 영수증을 내민다. 주위 사람들이 도와준 값어치가 빼곡하다. 잊지 않고 역시 차곡차곡 갚으려 한다.


-내가 혼자 집을 보러 다니며 약간 쓸쓸해질 때마다 친구들 카톡방에 사진을 보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런 집은 어딜 점검하고 부동산에게 뭘 확인받아야 하는지 알려주고 좋은 집 만날 거라며 응원해준 이사 베테랑 말띠 친구들. 이건 어때 저건 어때 귀찮게 물어봐도 늘 자기 일같이 찾아봐주는 부동산 실장님과 친구들 덕에 집 보러 다닐 때 집주인과 부동산이 내게 뭘 숨길까 불안하지 않았다. 내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내가 큰딸과 동갑이라 딸 같아서, 대학원생이라는 말에 얼마 전 정년 퇴임하신 교수님 본인의 제자 같아서, 홀린 듯 계약하고는 내심 불안했다는 집주인 아저씨. 5/31에 집값을 반만 보내도 날 믿고 전입신고하게 해 준 덕분에 모든 걸 진행시킬 수 있던 거다. 천장에서 물이 새긴 하는데… 우리는 잘 타협하고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네버엔딩 이사 일기가 될지도 몰라)


-대출을 은행 편하게 하려고 그랬는지 이랬다 저랬다 말을 바꿔서 내가 마음고생을 했지만, 일부러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삼자가 꼬인 복잡한 상황에서 나를 질책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상황과 대처 방법을 있는 대로 다 알려준 우리은행 김 과장님. 이 일을 시작한 것도 나, 해결해야 하는 것도 나. 중심을 잡고 집주인에게 주눅 들지 않게 날 푸시해주셨다고 생각한다. 내가 청년이라는 이유 하나로 1억의 돈을 빌려준 우리은행 고마워요. 이자는 제발 더 올리지 말아 주세요.


-‘집주인에게 이렇게 말해보세요’ 그쪽 감정 상하지 않게 내 할 말을 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주고 은행과 직접 통화해주고, 부모님이 못 도와주실 내 상황을 짐작하고 ‘대신 등기 이전해줄까’ 먼저 물어봐주신 부동산 사장님.


-실제 등기이전을 해주고, 나와 집에 대한 고민을 꼼꼼하게 나눠준 엄마. ‘엄마, 나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좀 괜찮아질 때까지 여기서 지내다 가도 될까?’ 내가 마음 편히 엄마 집에 머물게 해 줘서 이 그림을 며칠 만에 다 그려낼 수 있었다. 집에 하루 종일 있는 딸을 백수 취급할 법도한데 늘 대견하다 칭찬해준다. 엄마도 안다. 내가 얼마나 치열하고 절실하게 사는지 요즘에.


-비 내리는 수요일 양평에서 아침 일찍 달려와 기록적인 폭우 속에 이삿짐을 날라 준 아빠. 일흔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튼튼하고, 자상하고, 막내딸 장난도 잘 받아주고 먼저 손하트도 날릴 줄 아는 우리 아빠. 전세금 떼먹은 황지홍 덕분에(?) 다시 열심히 살아서 집 마련을 했으니 오히려 부자(?)가 된 것 아니냐는(?) 마음의 회복력도 큰 아빠.



4월 말 엄마 이사하던 날이 생각난다. 2월 어느 밤, 케케묵은 트라우마에 방아쇠가 탕! 당겨져 집에서 뛰쳐나오고 나서는 이젠 집안 대소사 때 가끔 안부나 전하는 사이만 되어도 좋겠다고 바랬다. 가족들과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평생 이사를 많이 다닌 우리는 이사라는 게 워낙 큰 일인 걸 아니까, 사이가 좋든 안 좋든 일단 도와주러 가다 보니 그 마음이 전해져 큰 일을 함께 헤쳐나가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내 집 보러 다니던 시기에 엄마 역시 힘들게 이사 준비하던 걸 몰랐고, 아빠는 언제 어디서 어디로 이사를 다니는지 몇 년간 모른척하고 살았지만, 부모는 아무런 담벼락 없이 내 이사를 진심으로 염려해주고 함께 의논해주었다. 우리 가족은 이제 스스로 자신의 이사를 해 내며 남의 이사도 도와주는 세 명의 어른이 되었다.


영화 <Lady Bird>에서 평생 엄마 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던 고등학생 딸은 엄마의 반대에도 꾸역꾸역 다른 지역의 대학으로 입학해버린다. 드디어 엄마를 떠나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딸은 폭주하던 마음을 한 숨 돌린다. 그리고 잠시 관계의 공백 후에, 우리 둘 사이에 사랑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이사 일기를 어떻게 완결하나 싶었는데 영화 <Lady Bird>를 보니 내가 사람들이 쌓아준 사랑으로 이 집에 이사 왔다는 것으로 완결이 되었다. 내가 이 집에 사는 건 기적이라서, 사랑은 곧 기적이다. 내가 이 집에서 벌써 세 달 째 살고 있으니 이 이사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 집에서 나의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려는 의욕이 매일 생겨난다.


벌써 4년 전. 나는 ‘지금’ ‘여기’에 있음을 일깨워준 아함메드와 지수에게도 늘 고맙다. 내 마음이 어떤지 자주 물어봐주고 나의 잠재의식 훈련을 지켜봐 준 친구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음을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으로 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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