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플 돼지가 되어버린 재택근무자
명수 옹은 말했지.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고. 내가 깨달았을 때, 이미 난 거대한 크로플 돼지가 되고 난 후였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정말 징하게도 재택근무를 하지 않았다. 작년 12월 코로나 감염자가 1000명을 넘어서야 팀장 재량으로 재택근무를 허락한다는 공지가 내려왔다. 와씨, 드디어 나도 재택근무를 한다니. 출퇴근 지옥철을 타지 않고 내 방에서 씻지도 않은 채 잠옷 바람으로 일을 할 수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이 사람 저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신경전을 하지 않아도 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재택근무 첫날, 노트북을 켜고 출근 체크를 하자마자 내가 처음 한 일은 배민을 켜고 점심 메뉴를 고르는 거였다. 두둑하게 아침밥도 챙겨먹었겠다 점심은 그냥 디저트로 몰방하기로 했다. 집 근처 좋아하는 카페에서 디저트를 배달시키려고 메뉴를 정독하다보니 오호라? 요즘 핫하다는 크로플 메뉴가 생겼다. 메이플시럽 크러플부터 갈릭치즈크로플, 티라미슈크로플, 딸기크림치즈크로플까지 아주 싹다 시켰다. 슬러시처럼 갈린 얼음을 잔뜩 넣어주는 아아도 잊지 않고 주문!
엇? 점심으로 주문하려고 했는데? 코앞에 있는 카페라 그런지 주문하자마자 곧 따끈따끈 갓 구운 크로플이 도착했다. 한입 베어 문 순간, 아니?! 이 맛은?! 바사삭 고소한 빵껍질 속 촉촉 쫄깃한 크로플, 각종 토핑과 어우러져 저마다 다른 극강의 맛을 전하는 팔색조 같은 매력이라니. 그날로 나는 크로플 귀신의 달콤한 계략에 걸려들고야 말았다.
띵똥! 띵똥! 띵띵띵 띵똥!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면 현관이 달도록 크로플이 배달되어 왔다. 24500원, 36700원, 28400원... 쌓이고 쌓인 주문액은 일주일 새 30만원이 훌쩍 넘어버렸다. 사장님 이 정도면 서비스로 크로플 하나 얹어 줄만 하지 않으신가요? 게다가 방에 들어앉아서 크로플만 먹는다고 엄마의 잔소리까지 날 힘들게 했다.
강구해내야 한다. 더 합리적으로, 더 맛있게, 더 자유롭게 크로플을 맛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곧장 와플 기계를 박의 집으로 주문하고 짐을 쌌다. 어차피 재택이니까 박의 집에 가서 내 맘대로 크로플 먹으면서 칩거하기로 결정했다. 박은 재택근무를 하지 않으니 늦은 저녁 시간을 제외하면 그 집엔 오직 나와 해피 단둘뿐. 날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버터, 크림치즈, 누텔라, 메이플시럽, 카야잼, 딸기잼, 바나나 등 나의 꿈을 펼칠 온갖 재료를 사서 곧장 박의 집으로 갔다.
레시피 1) 크로플 + 버터 + 카야잼
레시피 2) 크로플 + 버터 + 카야잼 + 크림치즈
레시피 3) 크로플 + 크림치즈 + 블루베리잼
레시피 4) 크로플 + 딸기잼 +메이플시럽
등등등등등등등등
온갖 조합으로 정말 원 없이 크로플을 만들어 먹었다. 행복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한두달 사이에 무려 8킬로가 쪘다는 것을. 급찐급빠라고 급하게 찐 살은 급하게 빠진다고 누가 그랬을까. 8킬로는 여전히 내 곁에 있다. 그래서 이제 크로플은 끊고 바스크 치즈케이크를 먹는다. 알럽 베이커리. 알럽 디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