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by 윤슬

우리는 코엑스의 영화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이 끝나고 헐레벌떡 버스를 타고 달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당신과 처음 만나기로 한 곳은 희한하게도 상영관 왼쪽 맨 뒷자리였습니다. 스크린에서는 광고가 요란하게 나오고 있었지만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앉아있기로 한 자리로 다가서며 고개를 똑바로 들지도 못했습니다. 빨간 카펫이 깔린 바닥만 보면서 제 자리를 찾아갔지요.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와 뛰어오느라 찬 숨을 고르며 옆자리에 앉은 내게 당신은 물을 건넸습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습니다. 나를 먼저 챙겨주었어요.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서로를 흘깃거릴 뿐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습니다. 상영관 밖으로 나선 뒤에야 서로를 똑바로 보았습니다. 영화가 얼마나 재미있고 좋았는지 얘기했지만 솔직히 나는 그 영화에 거의 집중하지 않았단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날 밤에 우리는 한강을 따라 걸었지요.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걸었습니다. 손등이 스치고 팔꿈치가 스쳤습니다. 주차장을 찾아가는 길에 나는 손가락 끝으로 당신의 옷깃 끝을 살며시 잡았습니다. 당신은 굳어버린 팔을 매달고 말없이 앞장서 걸어갔습니다. 나는 그날 처음 본 당신을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해 왔음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당신과의 이야기를 마음껏 쓰라고 했었습니다. 당신의 눈치도 보지 말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쓰고 싶은 것을 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과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의 한정된 언어가 우리의 이야기를 닳게 만들고 모퉁이를 깎아버릴 테니까요. 이렇듯 나는 나의 언어를 믿지 못하는데 당신은 나의 언어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향해 스스로 날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 곁을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나에게 자유롭게 살라고 말하는 당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도 그랬습니다. 당신이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당신이 쓰는 시의 다정함을 사랑했고 당신이 찍는 사진의 사소함을 사랑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시를 더 쓰라고, 사진을 더 찍으라고 종용하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얼마나 당신의 작품을 애정했는지 충분히 다 말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내 마음에 남는 것은 이렇게 주고 싶은 것을 어떤 이유로든 마음껏 다 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제 당신의 옷깃을 잡을 수 없고 당신의 시를 당신이 낭독하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당신이 찍은 사진에 대해 물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내밀함을 엿볼 수 없는 자리에 혼자 멀뚱히 서서 묻곤 합니다. 혼자가 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워졌을까요.


우리가 서로에게 바랐던 바람은, 서로가 바람대로 살기를 원했던 바람은,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누구의 바람이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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